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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험으로 끝난 삼성의 7·4제
1. 실험으로 끝난 삼성의 7·4제
  • 김윤지 기자
  • 승인 2004.0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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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신경영’ 일환 시작, 2002년 완전 폐지…조기출근 가장 큰 장벽으로 작용한 듯 최근 일고 있는 ‘아침형 인간’ 신드롬에서 삼성그룹의 조기출퇴근제(일명 7·4제)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20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국내 최고 대기업이 아침 7시 출근, 4시 퇴근 제도를 그룹 차원에서 실시한 대실험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업무는 일찌감치 끝내고, 이후 시간을 ‘자기계발’에 할애하라는 삼성의 7·4제는 요즘의 ‘아침형 인간’과 그 맥이 닿는다.
하지만 삼성 7·4제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93년 7월에 첫 깃발을 올린 이후, 계열사들이 속속 이탈하면서도 구조조정본부나 관리직 직원들만 겨우 유지하다 2002년 2월 말에 완전히 폐지됐다.
도입 초기에는 다른 대기업들도 이를 따라했을 만큼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이 제도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인재형 만들 목적으로 도입 7·4제 탄생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선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87년 12월, 이건희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으며 ‘제2창업’을 선언했다.
하지만 약 5년이 흐르는 동안 삼성이 변화한 것은 그다지 없었다.
고심하던 이 회장은 93년 어느 날 외국인 고문들을 모두 모아놓고 삼성의 문제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지시한다.
이때 외국인 고문들이 털어놓은 삼성의 상황은 이건희 회장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데 제대로 된 상품 기획서조차 없고, 오너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돼 조직이 정체돼 있으며, 상명하달에만 익숙한 조직문화 등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 회장의 마음을 가장 흔든 것은 일본인 기술 고문 후쿠다씨의 보고서였다.
삼성 제품의 디자인 문제점을 정리한 이 보고서에는 삼성이 바뀌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대량생산 위주의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질로 승부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 삼성의 상황에선 회사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 거둔 삼성의 양적 성장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회장의 결단을 이끈 것으로 유명한 ‘후쿠다 보고서’였다.
이후 그 해 6월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에 삼성 핵심 경영진 200여명을 모아 ‘신경영’을 선포한다.
이른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는 이야기로 더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바로 이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골자는 무엇보다 ‘질 경영’이었다.
상품의 질이 바뀌기 위해선 사람의 질도, 조직의 질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신경영의 상징적인 첫 조치가 바로 ‘7·4제’였다.
이 회장이 “변화의 절박성을 사원들 몸으로 직접 느끼도록 해야 한다”며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7·4제에는 무엇보다 새로운 인재형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앞으로 미래에는 한 가지 분야에만 정통하고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사람보다는, 자신의 전문분야는 물론 다른 분야까지 폭넓게 알고 있는 새로운 인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4시 이후에 가정에 있든 취미생활을 하든 공부를 하든 뭔가를 하면 입체적인 사고가 가능해 회사업무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게 이 회장의 주장이었다.
이렇게 도입된 7·4제는 만만찮은 파장을 몰고 왔다.
사원들은 갑자기 7시 출근, 4시 퇴근에 몸을 맞추느라 생체시계를 억지로 바꾸어야 했다.
회사에 와서 몰래 꾸벅꾸벅 조는 사원들이 속출했고, 4시 퇴근이 낯설어 4시에 퇴근했다 저녁을 먹고 6시에 다시 들어와 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출근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하지만 퇴근시간은 지키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꼽혔다.
94년 삼성그룹에서 기업문화 유포에 대해 인류학 현지조사를 수행한 장정아 인천대 교수는 “회사에 밤늦게까지 오래 남아 일을 하는 게 훌륭한 사원의 덕목으로 여겨지다가 갑자기 4시 퇴근을 유도하니, 직원들은 이것을 지키면 밉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워낙 그룹 비서실에서 강제로 밀어붙인 제도라 그룹 안에 정착은 됐다.
94년 삼성물산이 펴낸 ‘조기출퇴근제에 관한 임직원 의식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설문 대상자들은 조기출퇴근제 실시 이후 변화로 “일을 효율적으로 하려는 노력이 많아졌다”를 76.2%로 가장 많이 꼽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게 됐다”(58.1%), “개인의 능력개발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됐다”(47.2%) 순으로 응답해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설문 대상자들은 조기출근의 단점으로 수면시간 단축(65.4%), 거래선과의 시차(44.3%)를, 조기퇴근의 단점으로는 사내동료와 인간적 접촉 줄어듦(64.3%), 타 회사와 시간이 안 맞음(57%)을 주로 꼽았다.
즉 7·4제는 “업무 효율성과 자기계발이라는 열매를 얻는 대신, 수면시간을 억지로 줄여야 하는 고통과 비인간화되는 분위기를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면서, 이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힘있게 추진된 기간은 2~3년에 불과 삼성이 신경영의 신호탄으로 자신 있게 내걸었던 7·4제는 결국 제도의 장단점 사이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어느 순간 무너지며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96년부터 ‘삼성 7·4제 흔들린다’는 기사얘기는 꾸준히 흘러 나왔다.
이 제도가 힘 있게 추진된 것은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시행 후 얼마 가지 않아 해외업무 담당 부서나 다른 회사와 접촉해야 하는 영업부서, 은행시간에 맞춰야 하는 금융권 계열사에선 7·4제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계열사들이 속속 7·4제 이탈 대열에 들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그룹 전체에서 7·4제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삼성그룹측에선 7·4제를 폐지한 공식적인 이유에 대해 “7·4제가 자기계발, 업무효율화, 변화체험 등 도입 때 꾀하던 효과를 모두 충분히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런 효과를 모두 거두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근거 자료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문다.
외국어 자격 취득자가 2배 이상, 정보화 자격 취득이 18배 이상 늘었다는 숫자를 들이밀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도 그 숫자가 늘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한다.
즉, 제도 추진의 장점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설령 있다 해도 회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다만 그룹측에서도 조기퇴근제보다는 조기출근제가 폐지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장점이 강한 조기퇴근제보다 단점이 많은 조기출근제의 영향이 더 강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자기계발 기회 확대’라는 장점이 잘 이뤄지지 않았거나 혹은 이뤄졌다 해도, ‘수면시간 부족’과 같은 단점을 넘어설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제도 폐지의 뒤편에는 “서울지역 집값이 상승하면서 서울 외곽에 거주하는 직원들이 점점 늘어나 조기출근제를 계속 끌고 나가는 게 힘들었다”는 점도 있다고 귀띔한다.
9년 동안 밀어붙인 삼성식 ‘아침형 인간’ 제도가, 끝내 ‘편히 잠잘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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