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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MBA 리포트] 나이키 이야기(1) - 세계화의 황태자에서 노동착취 기업으로
[이원재 MBA 리포트] 나이키 이야기(1) - 세계화의 황태자에서 노동착취 기업으로
  • 보스톤=이원재 기자
  • 승인 2004.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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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개혁파 정치 신인이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됐다.
보수적 기성 정치인이 같은 사건에 연루됐을 때와 비교해 유권자들은 얼마나 배신감을 더 느낄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유권자들은 기성 정치인이 이보다 더 큰 부패에 연루됐을 때보다도 훨씬 더 배신감을 느낀다.
젊고 세련된 나이키 스포츠용품이 노동착취 공장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비자들도 이와 비슷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 좋은 마이크로소프트 유럽생활을 청산하고 나이키로 옮겨오다니요. 그것도 지옥 같던 1998년에 말이죠. 제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연단에 오른 여성은 나이키 기업책임 담당 부사장 마리아 에이텔이었다.
푸념으로 입을 연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건, 나이키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제3세계 노동착취와 어린이 학대의 주범이라는 범죄자 이미지에서 벗어나 정상 기업으로서의 새 삶을 살기 시작했는지를 설명하는 대목부터였다.
에이텔은 세계화가 기업들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하며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토론하는 시간에 앞서 발제자로 초청됐다.
지난 96년, 미국 잡지 <라이프> 6월호에는 12살짜리 소년이 나이키 상표가 찍힌 축구공을 바느질하고 있는 사진과 함께 파키스탄 시알콧지역에서의 어린이 노동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각종 매체들이 앞다퉈 이 사진을 받아 썼고, 나이키 제품이 아동 노동으로 만들어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에이텔은 이 보도가 나이키를 완전히 바꿔놓은 대형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이 뉴스는 곧 미국과 유럽 사회를 들쑤셔놓았다.
월드컵 경기장부터 동네 축구장까지 전세계를 누비며 아이들에게 꿈을 주던 수많은 축구공이 대부분 어린이들을 착취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이었다.
미국 소비자 단체들은 어린이 노동으로 생산된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발표를 잇따라 내놓았다.
노동조합들과 시민단체들은 시알콧지역에서 생산된 축구공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라는 광고 문구를 빗대 ‘어린이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서라도 무조건 생산하고 보란 얘기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전혀 대응할 준비가 돼 있지 않던 나이키는 상황파악조차 제대로 못한 채 허둥댔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겠다며 축구공을 팔던 젊은 기업 나이키는, 순식간에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바느질을 시켜 축구공을 생산해 비싸게 파는 악덕기업의 이미지로 인식되고 말았다.
운명을 뒤바꾼 한 장의 사진 나이키는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로 세계화의 맏아들 역을 자임하며 유명세를 탄 기업이다.
나이키 창립자 필 나이트는 스탠포드 비즈니스 스쿨을 다닐 때, 본사가 디자인과 마케팅만을 맡고 생산은 모두 다른 회사에 아웃소싱하는 이 모델을 고안해 냈다.
아웃소싱 비용이 낮은 곳을 찾다 보니 점점 임금이 낮은 해외로 생산 거점이 옮겨가게 됐다.
나이키 제품은 처음 일본에서 시작해 한국을 거쳐 최근에는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 주로 제3세계의 각지에서 생산된다.
이런 방식으로 자유자재로 계약을 맺고 또 해지하며 생산자를 바꾸기 때문에 생산 공장을 직접 갖고 있는 다른 기업들과 견줘 몸이 가볍고 경쟁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세계화 바람을 타고 나이키 방식은 세계화를 이끄는 모범적 경영방법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나이키 본사는 마케팅과 디자인 부서만 있는 탓에 항상 광고회사나 디자인 회사처럼 상상력과 창의력이 넘치는 분위기라,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MIT 슬론스쿨의 리처드 로크 교수의 기업사례연구 <세계화의 약속과 도전: 나이키의 사례>에 따르면, 나이키는 이렇게 전세계 노동력을 이용하는 전략을 펼친 결과 쉬지 않고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블루리본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72년 ‘나이키’ 브랜드를 출범시키고 78년 회사이름을 아예 나이키로 바꾼다.
그리고 매출쪽에서는 프로 스포츠 부흥에 힘입은 미국 스포츠 의류산업의 급속한 성장에 올라타고, 비용쪽에서는 과감한 국제 아웃소싱으로 마진폭을 넓혀나간다.
85년 50억달러였던 미국 운동화시장은 2001년 130억달러까지 커졌다.
나이키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91년 22.5%에서 97년 35.3%까지 늘어났다.
나이키는 이렇듯 상상력, 창의력, 젊음, 꿈, 세계화 등과 같이 새롭고 좋은 단어는 모두 독점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그런데 <라이프>의 보도는 소비자들에게 이 모든 이미지가 거짓이었다는 배신감을 안겨다준 것이다.
당연히 브랜드 이미지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재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 지난 97년 11월에는 베트남 공장 내 유해물질 사건이 터진다.
나이키의 하청업체 가운데 하나인 한국 태광실업의 베트남 공장에서 기준치의 최고 177배나 되는 유독물질 톨루엔이 검출됐다는 소식이 <뉴욕 타임스>에 보도된 것이다.
그것을 폭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태광실업의 감사를 직접 담당한 언스트 앤드 영이라는 세계적 컨설팅업체 컨설턴트였다.
그런데 사건이 보도되기 전 나이키가 태광실업에 사람을 보내 안전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하게 했다는 사실이 함께 밝혀지면서, 나이키는 이제 노동착취 기업일뿐 아니라 거짓말을 일삼는 기업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 전에 하청업체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잘못된 노동관행이 한꺼번에 언론에 터져나온다.
9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의 최저임금 위반 사례도 불거져나왔다.
한국 하청기업의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최저임금 규정을 위반했다는 사례가 보도된 것이다.
새로운 얼굴의 세계화 나이키에게 세계화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윤리와 책임이었다.
세계화가 가져다준 효율성도 상상력도, 다국적 기업의 경영이념이던 주주 중심주의도, 부도덕한 경영행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사회의 물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뉴욕타임스>나 CNN에 나이키의 부도덕성을 드러내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주가와 매출은 추락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나이키는 여전히 우리 회사가 아니라 하청업체에서 잘못한 일 아니냐며 책임을 직면하려 하지 않았다.
나이키가 책임소재를 따지고 있는 동안에도 가장 큰 경쟁자인 ‘리복’과 ‘아디다스’는 “우리는 인권을 생각하는 기업이며, 우리 제품은 100% 미국공장에서 생산됩니다”라고 광고공세를 벌이며 나이키 브랜드 이미지 타격을 더욱 부추겼다.
기사에서나 광고에서나 나이키에 붙는 수식어는 대부분 ‘아동 노동’, ‘노동착취’ 같은 단어였다.
리처드 로크 교수의 조사 결과, 세계 51개 주요 영자신문에서 나이키가 아동 노동, 착취, 노동착취공장(sweatshop)이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한 기사의 개수는 92년 6건이던 것이 97년 300건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했다.
처음 나이키에게 세계화는 번영의 상징처럼 보였다.
세계화는 저비용 생산이고, 저임금 노동이며, 아웃소싱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세계화가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사회는 또 소비자들은, ‘세계화한 기업’ 나이키에게 이전에 요구하지 않던 새로운 윤리와 책임을 요구했다.
새로운 얼굴의 세계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부하던 나이키는 결국 세계화 전략 자체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기 전까지 질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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