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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기획] 대한민국은 ‘땅 공화국’
[테마기획] 대한민국은 ‘땅 공화국’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4.06.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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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소유의 편중, 빈부 격차 확대 악순환 불러…높은 땅값 고비용·저효율 주범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어리석은 농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농부는 하루 종일 걸은 만큼의 땅을 무조건 1천루블에 판다는 ‘환상적’인 조건에, 한 뼘이라도 땅을 더 차지할 욕심으로 쉬지 않고 걷는다.
그러다 해는 저물고, 농부는 제시간에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피를 토하고 죽는다.
결국 그가 묻힌 무덤 3아르신(210cm)이 그가 차지할 수 있는 땅의 전부였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이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땅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이 땅을 소유하려고 기를 쓴다.
이유는 분명하다.
요지의 땅 몇백 평을 물려받은 사람은 자손대대로 아무 걱정 없이 잘 살지만, 땅 한 평 물려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일하고도 변변한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다.
부동산 투기의 광란 속에서 땅을 가진 이는 앉아서도 하루아침에 일확천금을 챙기지만,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마련하지 못한 이들은 집값, 전셋값에 허리가 휘어 땅이 꺼지는 절망감에 휩싸인다.
세상에 믿을 것은 오직 땅밖에 없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


대개의 경우, 땅에 대한 감정은 이중적이다.
투기꾼들을 박멸되어야 할 암적 존재로 보면서도 ‘능력’만 된다면 누구나 주저 없이 땅을 사고 싶어한다.
그래서 늘 땅은 재테크 투자 대상 1순위다.
전문가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해 9월 국토연구원이 155명의 교수, 연구원, 공무원, 언론인 등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24.2%가 가장 심각한 땅 문제로 투기를 꼽았다.
개발이익의 사유화(23.9%), 높은 땅값(20.0%), 토지소유 편중(13.9%), 도시용지의 절대 부족(12.0%)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여유자금 1억원이 생기면 어디에 투자하겠느냐고 물으니 27.4%가 땅이라고 답했다.
역시 땅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땅은 물이나 공기와 똑같이 위대한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그런데 오직 땅에만, 가는 곳마다 주인이 정해져 있다.
광물은 애써 묻힌 곳을 찾고 수백 미터 지하를 뚫고 들어가 캐내 와야 하지만, 땅은 소유하는 데 아무런 ‘노력’이 들지 않는다.
땅은 이미 항상 그 자체로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모든 땅은 ‘왕의 것’이었다.
공신이나 관리에게 땅을 내려줄 때에도, 소유권은 여전히 왕에게 있었다.
허락되는 것은 그 땅에서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수조권)뿐이다.
그러나 왕조의 질서가 흔들릴 때 이러한 원칙은 유명무실해진다.
권문세가와 토호들은 이웃의 토지를 빼앗고, 산야를 개간해 자신의 땅을 넓히는 데 몰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농장’은 그의 자식에게 상속됐다.
토지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전국의 토지를 다시 측량하는 여러 차례의 개혁이 있었지만, 이러한 악순환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남이 사면 투기, 내가 사면 재테크?

근대적인 토지소유 관계가 도입된 것은 일제 시대다.
개인이 ‘합법적’으로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땅 부자는 이때부터 등장했다.
전라남도 보성의 박남현은 ‘박팔만’이란 병칭으로 불렸다.
그의 땅이 팔만석지기였기 때문이다.
대략 1600만평에 해당하는 규모다.
박팔만이 한성 갈 때는 자기 땅만 밟고 다녔다는 말도 전해진다.
1930년대 전남에서 500정보(150만평) 이상 땅을 가진 지주가 9명이나 됐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과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대부분 몰락해 갔다.
그 후 70~80년대 경제개발과 함께 이른바 땅 투기로 한몫 잡은 ‘졸부’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누구에게나 땅의 소유권은 목숨보다 중요하다.
한없이 너그러운 시골의 촌로들도 일단 땅 문제만 걸리면, 얼굴이 붉어져 핏대부터 올린다.
땅에 대한 욕망은 앞뒤 사정을 가리지 않는다.
땅의 소유권과 관련해 관심을 끄는 사건이 2가지 있다.
먼저 친일파 후손의 땅 찾기 소송이다.
지난 6월11일, 일제 시대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이근호의 손자가 경기도와 충청북도 일대의 국유지 4천평이 자신의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시가로 60억원이 넘는 땅이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토지조사부를 증거로 제출해 현재로서는 이들의 승소 가능성이 높다.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 후손들이 93년부터 비슷한 소송을 내고 있다.
법원의 판결은 아무리 친일파라도 법률적으로 사유재산권은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장롱 깊숙이 북한 땅의 땅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실향민들의 경우다.
최근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옛 땅 문서를 다시 꺼내보는 사람들이 많다.
40만명의 실향민 가운데 약 5만명 정도가 땅 문서를 갖고 월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통일이 되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을까. 결론은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은 46년 토지개혁을 단행하며 모든 토지 관련 공문서를 불태웠다.
북한에 부동산등기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월남자들의 땅 문서만으로는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게다가 북한이 호적제도를 폐지해, 소유권을 가진 본인이거나 상속인이라는 점도 입증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소유권의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일정 수준의 금전적인 보상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면적기준, 상위 5%가 전체 땅 65.2% 차지

이런 사례들은 땅의 소유권 문제를 약간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시야를 열어준다.
땅의 소유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땅 소유의 심각한 불평등은 이러한 의문을 더욱 크게 한다.
우리나라 땅 소유의 편중 현황이 처음 밝혀진 것은 지난 88년. 토지공개념연구위원회의 조사 결과, 면적 기준으로 상위 5%(54만명)가 전체 땅의 65.2%를 차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하위 50%가 갖고 있는 땅은 겨우 2.0%에 불과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 거주자의 60~70%가 단 한 평의 땅도 갖고 있지 못했다.
95년 국토연구원의 조사에서도 땅 소유의 편중 현상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이번에는 면적이 아니라 공시지가가 기준이 되어 비교가 이루어졌다.
상위 5%가 50.6%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위 50%가 갖고 있는 땅은 전체 토지의 2.6%에 불과했다.


이러한 편중된 땅 소유로 빈부격차가 더욱 확대 재생산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땅은 단순히 갖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소유자에게 막대한 불로소득을 안겨준다.
80년 135조원이었던 우리나라의 전체 땅값이, 2001년엔 1419조원으로 뛰었다.
땅값 상승으로 발생한 불로소득이 무려 1284조원에 이르는 것이다.
땅을 소유한 일부계층만이 이 열매를 따갔다.
우리나라의 근로소득 격차는 지표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심각한 편이 아니다.
또한 근로소득의 차이는 능력이나 생산성, 교육, 경력 등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반면 땅의 소유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좀처럼 정당화하기 어렵다.
땅값 상승에 소유자가 기여한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땅값 상승은 도로를 뚫고, 학교를 세운 사회공동체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땅값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도 걱정거리다.
2001년 지가총액은 1419조원이었다.
이는 같은 해 국내총생산(GDP)의 2.6배, 총 예금의 3.1배, 총 대출금의 4배, 상장주식 시가총액의 5.5배, 피고용자총보수액의 5.8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지가총액으로 따지면 우리나라는 일본과 미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평당 가격으로 따지면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땅을 모두 팔면 캐나다를 6번, 프랑스를 8번 살 수 있다.


좁은 국토에 인구가 많다 보면 땅값이 오르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그러나 땅의 가격은 일반 상품의 가격과는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자동차의 수요가 늘어 가격이 올라가면 자동차회사는 생산을 늘린다.
이때 가격은 생산자에게 생산량을 늘리라는 신호가 된다.
가격은 이러한 식으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땅의 경우는 공급량이 한정돼 있다.
아무리 가격이 올라도 땅을 더 만들어낼 수는 없다.
우리 국토의 면적은 99만㎢로 고정이다.
60년부터 90년까지 수많은 간척사업을 벌였지만 겨우 국토면적을 0.8% 늘리는 데 그쳤다.
땅이 부족하다고 수입해 올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땅값 상승은 땅 소유자의 불로소득을 늘려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게 많은 경제학자들의 분석이다.
반대로, 높은 지가는 경제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높은 땅값은 고임금, 고금리, 고규제와 함께 한국 경제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이루는 핵심 요소로 꼽힌다.
땅값이 올라가면 공장용지의 분양가와 주택가격이 함께 올라간다.
주거비의 상승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동산 세제에 메스를

그러나 이렇게 얽히고설킨 땅 문제를 풀기 위해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다.
땅의 소유권은 많은 사람에게 ‘신성한’ 사유재산권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땅 소유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국토의 효율적인 활용이 가능해진다는 주장도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많은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세금을 통한 불로소득(개발이익)의 환수다.
90년 토지공개념 도입과 함께 시행된 토지초과이득세, 택지소유상한제, 개발부담금제 등이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와 위헌 판결을 받고 폐지됐거나 대폭 축소됐다.
게다가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기활성화를 명분으로 토지 관련 규제가 대폭 확대됐다.
80년에서 2001년까지 발생한 개발이익은 모두 1284조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토지 관련 조세와 부담금의 형태로 환수된 것은 113조원, 8.8%에 불과하다.
공시지가가 시장가격의 평균 70~80% 수준이란 점을 고려하면, 실제 환수비율은 4.6~6.6%에 그친다.
전문가들은 개발이익의 환수 수준이 최소한 25% 정도는 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부자들은 자식들에게 주로 땅을 물려준다.
전체 상속재산의 60%를 땅이 차지한다.
그 이유는 2가지다.
우선 땅으로 주면 세금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공시지가와 실제 매매가격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세금은 실제 매매가격이 아니라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내면된다.
두 번째는, 운이 좋으면 자식 대에라도 덤으로 의외의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땅에 관한 한 우리나라의 세금제도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부동산 관련 세제의 개혁과 이를 통한 개발이익 환수로 방향을 잡은 참여정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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