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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뚜앙테리요르] 아듀, 유로 2004
[푸뚜앙테리요르] 아듀, 유로 2004
  • 김윤영/ 소설가
  • 승인 2004.07.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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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우승이 가장 큰 뉴스긴 하지만 유로 2004는 그것 말고도 쏠쏠한 얘깃거리가 꽤 있었다.
특히 ‘위대한 아주리의 몰락’이 내겐 가장 흥미로웠다.
다음은 똥볼을 찬 베컴이다.
똥볼이야 소싯적 황선홍도 자주 찼지만, 베컴처럼 똥볼을 한번 찰 때마다 몸값이 팍팍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나는 아주리팀과 베컴이 죽쑤는 걸 보는 게 그리스나 체코의 선전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그들을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한 어이없는 죽음에 속수무책인 이 사회에 대한 실망을 잠시 잊을 수 있었으니까.
유로 2004가 끝났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으로 시국이 여전히 흉흉한 이 마당에 무슨 축구 얘기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새벽 3시40분에 일어나 TV 앞에 앉을 나의 자유를 아무도 막을 순 없었다.
그리스의 우승이 가장 큰 뉴스긴 하지만 이번 대회는 그것 말고도 쏠쏠한 얘깃거리가 꽤 있었다.
특히 ‘위대한 아주리의 몰락’이 내겐 가장 흥미로웠다.
16강 엔트리에도 끼지 못하고 망신당한 이탈리아는,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랬고 유로 2000 결승 때도 그랬으며 향후 100년간을 계속 그럴 것처럼, 지고 나서는 늘 징징대며 ‘음모론’을 운운했다.
이번에도 스웨덴과 덴마크가 짜고서 이탈리아를 탈락시켰다고 난리였다.
이제는 진짜 지겹다.
4년 전인가, 처음 이탈리아 팀을 보았을 땐 지겹긴커녕 황홀했다.
(아니, 뭐 저런 팀이 다 있냐, 왜 이렇게 다 잘생긴 거야, 게다가 축구까지 잘하잖아) 카테나치오가 아직도 유효한 이상, 돈과 인기와 팬들, 특히 여자들이 그들을 에워싼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엄청난 몸값을 받는 일류 선수들에게 국가 대항전에서도 늘 최선을 다해달라 순진하게 요구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팀처럼 모든 선수가 돈 냄새와 오만으로 똘똘 뭉쳐 있는 팀은 그 후로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건성으로는 아니지만 매우 이기적으로 그라운드를 뛴다.
물론 질질 끄는 지겨운 경기방식이야 1차적으로 감독에게 (아직도 트라파토니!)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뻔뻔하고 성의 없고 졸렬한 경기 매너와 승패 시비는 정말 질린다.
일례로, 이번 대회에서도 토티는 상대 선수에게 침을 뱉는 행위로 한 경기에 대해 출장 정지를 당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제, 내게 그들의 미모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아주리를 보기를 원할 뿐이다.
다음은 베컴이다.
베컴에게 돌아가면 얘기는 또 재밌어진다.
포루투갈 전에서 보여준 그의 승부차기 똥볼. 아, 정말 베컴을 보면 돈이 보인다.
스포츠와 광고, 매스컴, 외모, 인기, 스캔들 등등의 함수관계가 선명해진다.
서른도 안 된 축구 선수의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조잡한 사진집)이 먼 나라 일본에서 30만부나 넘게 팔리면서 ‘베컴 후유증’이란 용어를 남겼다.
그의 이름을 넣은 영화제목이 나오고 인기 절정이었던 걸스 그룹의 멤버와 전격 결혼도 했다.
남성잡지 의 표지로도 곧잘 등장했다.
그런 베컴이 똥볼을 찼다.
그것도 4강행을 결정짓는 승부차기의 첫 키커로 나와서. 그것도 거의 홈런볼 수준으로. 덕분에 그날로 잉글랜드 팀은 짐을 싸야 했다.
똥볼이야 소싯적 황선홍도 자주 찼지만, 베컴처럼 똥볼을 한번 찰 때마다 몸값이 팍팍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그의 인기의 밑바탕은 사실 그의 왼발에 있다.
그런데 거기서 슛이 작렬하지 않는다면 그의 몸값도 언젠가 바닥을 칠 게다.
기껏해야 30대 중반쯤 교체 멤버로 뛰고 나선 그저 그런 연예인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연기나 노래가 힘들면 뭔가 다른 재주를 익혀야 할지 모른다.
나이가 들면 새 재주를 배우기 힘들 테니 약간 걱정은 된다.
재산도 이혼 위자료 등으로 다 날리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는 지독히도 운좋은 스타 플레이어임에 틀림없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뛰는 산타크루즈를 보라. 그 외모에, 그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은 나라 파라과이 출신의 일개 축구 선수에 지나지 않는다.
베컴보다 더 눈에 띄는 외모를 갖고도. 그게 인생이다.
국적도 가려서 태어나야 할 판이다.
축구든 국력이든 빌빌거리지 않는 나라에서 말이다.
아무튼 나는 아주리팀과 베컴이 죽쑤는 걸 보는 게 그리스나 체코의 선전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그들을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한 어이없는 죽음에 속수무책인 이 사회에 대한 실망을 잠시 잊을 수 있었으니까. 아주 잠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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