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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A리포트]들어는 봤나요?시간제 이사님
[MBA리포트]들어는 봤나요?시간제 이사님
  • 보스톤=MIT 슬론 스쿨 M
  • 승인 2004.07.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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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은 항상 회사 주인인 양 행동한다.
눈에 띄기만 하면 매출이니 이익이니 시장 상황 얘기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주는 건 물론이거니와, 사무실 물건 아껴 쓰라는 잔소리까지 퍼부어댄다.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알지 못한다며, 밤에도 회의를 하고 휴일에도 책상을 지킨다.
대부분 회사의 풍경이다.
실제로 이사는 곧 회사다.
등기이사는 주주들을 대리해 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니, 회사 주인처럼 행동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아르바이트처럼 정해진 시간에만 회사에서 일하거나, 심지어는 재택근무를 하는 시간제 이사가 등장한다면 어떨까?
“투표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법률회사의 인사결정권자라고 합시다.
회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은 실적을 보여주고 있는 변호사 줄리 로스를 이사(파트너)로 승진시키겠습니까? 다만 로스는 3년 전 아이를 출산하면서 비정규직 시간제로 고용 형태를 바꾼 상태입니다.
또 한 명의 이사 승진 대상자는 정규직일 뿐만 아니라 일을 맡으면 회사에서 밤샘을 하며 헌신적으로 일하는 톰 브로워입니다.
하지만 실적을 보면 브로워의 영업력은 로스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왔군요.” 강의실에 들어선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1990년대 초 미국 법률회사 MN&A의 한 이사회에서 실제로 이사들이 받았던 질문이었다.
고민스러웠다.
유능한 사람이 이사가 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로스는 분명 유능한 변호사였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이사’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사면 경영진인데, 경영진은 회사를 목숨처럼 여기고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무한책임을 질 태세라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가족보다도 국가보다도 회사가 더 중요한 한국 대기업의 이사님들과는 달리, 로스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책임만 지는 시간제 직원이었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른 변호사의 절반 정도 시간만 회사에서 보내는 그를 이사로 승진시켜도 될까? 그가 일주일에 80시간씩 일하는 변호사들을 관리하며 이사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 투표 결과 학생의 3분의 2 이상이 로스를 승진시키는 데 찬성했다.
반대로 브로워에 대해서는 절반 이상이 승진을 반대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인만큼 이사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크지 않았던 걸까? 수업에는 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 열렸던 회사의 실제 회의록과, 이 논쟁에 대한 전문가 5명의 서면 의견이 공개됐다.
그런데 실제 이사회에서는 학생들 사이에서와 달리, 로스의 승진에 대해서 찬반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대신 브로워는 쉽게 승진했다.
승진의 평가기준, 헌신성이냐 효율성이냐 로스를 승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쪽에서 내놓은 가장 큰 명분은 역시 헌신성 문제였다.
현직 이사 4명 중 유일한 여성 이사는 승진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 변호사들은 이사 승진 시점이 되면 업무능력은 다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며 이사로 승진했던 까닭은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오랜 시간과 큰 열정을 회사에 헌신했기 때문이었죠. 업무 능력 자체는 이사 승진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 이사는 회사를 제 몸 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고전적 주장이다.
두 번째로 다른 변호사들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위화감이 지적됐다.
또 다른 이사가 말했다.
“로스의 탁월한 업무 실적은 다른 변호사들보다 우월한 조건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들과 자잘하고 궂은 일들은 로스에게 맡겨지지 않았죠. 다들 로스의 시간 사정을 고려해 일을 맡겼으니까요.”여성 이사도 거들었다.
“로스를 승진시킨다면 우리는 나머지 변호사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회사를 위한 헌신은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셈입니다.
” 조직의 단결을 해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고전적 주장. 세 번째로 관리감독업무의 특수성이 제기됐다.
조언에 나선 다국적 제약회사 머크의 인사 담당 부사장은 말했다.
“머크도 노동 시간을 줄이고 직원들의 ‘웰빙’을 진작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제로 고용된 임원은 없습니다.
솔직히 관리감독을 시간제로 할 수는 없잖습니까?” 하지만 전략적으로 볼 때 로스를 승진시켜야만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이제 헌신성이 경쟁력에 도움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는 의견이 나왔다.
보스톤 대학의 티모시 홀 교수는 말한다.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헌신성은 경쟁력이 아닙니다.
시장과 종업원들은 이제 모두 더 높은 유연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효율성만이 경쟁력입니다.
” 유능한 변호사를 계속 채용하고 일하게 하려면 유능한 변호사를 승진시켜야만 한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사회 의장은 말했다.
“유연한 근무환경을 제공하지 않으면 유능한 변호사들이 떠납니다.
최근에도 몇 명의 좋은 변호사들이 더 유연한 환경을 찾아 회사를 떠났습니다.
젊은 로스쿨 졸업생들은 물론 더 유연한 환경을 원합니다.
개인의 삶을 충분히 누리면서도 효율적으로 일하기만 한다면 최고 지위까지 승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 기술적으로 보더라도, 고객으로부터 시간당 수임료를 받는 법률회사의 특성상 시간제 고용이 다른 업종에 견줘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경제로 가기 위한 조건 어쨌거나 꿈 같은 얘기다.
기업의 중역 노릇을 정해진 시간만 정확하게 해주고 나머지 시간은 가족과 행복하게 보내다니. 그런데 적어도 보스톤 법률업계에서, 꿈은 이루어졌다.
논의는 점점 확산되고 변호사는 물론 임원들도 시간제 고용을 도입하는 법률회사가 늘어났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여성변호사협회 조사로는 2000년 보스톤 지역 주요 법률회사의 90% 이상이 이사와 변호사들에게 시간제 고용 선택권을 줬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변호사의 5% 이하, 이사의 2% 이하만이 시간제 고용을 선택했다.
고위직 변호사의 2%만이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개인 취미생활을 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조사 결과 대부분이 시간제 옵션을 선택할 경우 동료 변호사들로부터 받게 될 시선이 두렵다고 응답했다.
‘일하기 싫어하는 변호사’라는 동료들의 평가를 받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암암리에 승진에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로 시간제 고용을 선택한 뒤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보고도 여러 건 올라왔다.
놀랍게도 꿈을 이루는 데 가장 큰 적은 바로 옆의 동료들이었던 셈이다.
웰빙이 유행이다.
주5일 근무제도 일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주5일 근무제로의 이행은 그냥 근무 일수를 6일에서 5일로 줄이는 산술적 변화가 아니다.
주6일 근무제는, 개인이 회사를 위해 희생하고, 희생을 거부하면 시스템에서 낙오되는 사회의 상징이었다.
주5일 근무제는 회사가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배려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의 상징이다.
여유를 부리기 위해 시작한 게 아니다.
사람을 챙겨 인적자원을 전략적으로 관리하지 않고서는 이익창출도 경제성장도 불가능하다는 공감대 아래 시작된 필연이다.
공장과 석유가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취급되던 경제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경제로 옮겨가려면 제도뿐만 아니라 문화와 가치관에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건 당연하다.
주위를 살펴보자. 우리 회사는 이제 주5일 근무제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의 문화와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은 주5일 근무제를 받아들였나? 나와 나의 동료들은 시간제 이사님을 모시고 신나게 일해 볼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가? 다음호 장애아동 엄마가 로펌에 가져다 준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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