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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 기자의 밑줄긋기]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장승규 기자의 밑줄긋기]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4.11.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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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의 적, 자본주의 조지 소로스 지음, 형선호 옮김, 김영사 펴냄, 8900원 1998년 출간됐으니 좀 오래된 책이다.
아시아 금융위기와 러시아의 모라토리움(채무불이행) 선언이 이어지던 긴박한 국면에 쓰여진 탓에 과장된 부분도 있고, 오늘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 내용도 간혹 눈에 띈다.
책 제목에 있는 ‘세계 자본주의’는 상품과 서비스, 특히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특징 지워지는 ‘Global Capitalism’을 가리킨다.
전설적인 헤지펀드 퀀텀펀드의 설립자로 수십년 동안 세계 금융시장을 주무르며 억만장자가 된 소로스는 ‘국제적인 환투기꾼’으로도 불리고, ‘철학이 있는 투자가’로도 불리는 좀 묘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다.
최근에는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기 위해 1700만달러(약 188억원)의 거액을 썼다.
부시의 승리로 선거가 끝나자 자신의 웹사이트를 통해 “슬프다”는 짤막한 논평만을 남겼다.
소로스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쓴 철학자 칼 포퍼를 가장 큰 스승으로 삼았다.
동구권의 민주화를 위해 ‘열린 사회 재단’을 세운 것만 봐도 그가 포퍼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잘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자신의 투자전략과 포퍼의 철학을 연결 짓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소로스는 ‘투자가’나 ‘투기꾼’보다는 ‘사상가’나 ‘운동가’로 남기를 바라는 듯하다.
세계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은 ‘시장 근본주의’다.
대처와 레이건의 집권 이후 주류로 부상한 이 극단적인 사상은 전체주의만큼이나 열린 사회에는 위험한 것이다.
전체주의가 ‘닫힌 사회’를 강요한다면, 시장 근본주의는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혼란 사회’를 조장한다.
시장은 본질적으로 예기치 않은 급등(boom), 급락(bust)의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로스는 ‘반사성’(reflexivity, 반성성 또는 재귀성으로 옮길 수 있다)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동원해 시장의 결함을 해명한다.
일반적인 자연현상과는 달리 경제와 사회영역에서는 ‘생각하는 참여자들’의 기대와 선택이 결과에 영향을 주는 ‘피드백’이 작동한다.
이는 시장의 흐름이 급격하게 한쪽으로 쏠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느 날 투자자들이 기업의 주당수익 성장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 결과 해당 기업의 주가가 치솟고, 이 기업들은 높은 주가를 이용해 주가가 낮은 기업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기업의 수익률은 더 높아지고, 더 많은 투자자가 몰려든다.
그러나 기업 인수에는 한계가 있다.
마침내 주가 폭락이 시작된다.
소로스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8단계로 세분화한 모델을 투자에 실제로 적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시장 근본주의는 이러한 시장의 불안정성에 속수무책이다.
국제 금융 시스템은 이미 82년과 94년, 97년 3차례 붕괴를 경험했다.
일단 위기가 시작되면 중심에서 주변으로 향하던 자금의 흐름이 갑자기 역전된다.
주변 국가에서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이다.
만약 이때 주변 국가들이 국내적인 정치적 압력에 밀려 자본유출을 막기 시작하면 혼란은 정점으로 치닫게 된다.
최근의 상황으로 볼 때, 다시 위기가 닥친다면 이번에는 더 많은 주변 국가들이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소로스는 자본주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자본흐름을 규제하는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고, 시장가치를 초월한 사회적, 도덕적 가치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제안은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묻혔다.
이제 소로스의 구상이 다시 한번 진지하게 논의되기 위해서는 어쩌면 또 한차례의 위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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