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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 열전/유일한]아홉 살 소년, 아메리카로 떠나다
[기업인 열전/유일한]아홉 살 소년, 아메리카로 떠나다
  • 박덕수/작가
  • 승인 2005.05.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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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명의세계한복판에서평생신념의싹틔우다


미국지도를펼쳐놓고,네브라스카주를손쉽게찾을수있는한국사람이과연얼마나될까?

1895년평양에서태어난유일한이만9살되던해인1904년도착한곳이바로네브래스카다.
지금으로부터100여년전,라이트형제가발명한최초의동력비행기가36m를날던시절의일이다.
당시조선에서미국에갈수있는방법은인천항에서화륜선을타고후쿠오카,고베,호놀룰루등지를거쳐샌프란시스코에도착하는길뿐.최소한3개월이걸리는여정이었다.
출국을하기위해서는오늘날의여권처럼대한제국에서발행한‘집조’(執照,40×51.8㎝로지금여권20배쯤되는엄청난크기였다)라는증명서가필요했고,그걸받아내기란쉽지않았다.


그런상황에서,도대체그의아버지는무슨생각으로9살난어린아이를낯선땅미국에,그것도혼자보냈을까?유일한의일생에걸친의지와신념을이해하기위한첫번째열쇠가바로여기에있다.


부친유기연은아들을왜미국에보냈을까

유일한의부친유기연(柳基淵)은경북예천출신으로,평양에정착한상인이었다.
그리고기독교인이었다.
‘상인’과‘기독교인’은유기연의정체성을이해하는실마리이다.


19세기말20세기초의조선인중심의자본은대략3가지형태로나누어볼수있다.
첫번째는전통적인기득권을가지고있었던종로의육주비전등어용상인들을중심으로한상업자본이었다.
다음으로지주계층이상업자본내지산업자본으로전환한경우이다.
인촌김성수일가가설립한경성방직등이대표적인예이다.
마지막으로평양,개성,대구,강경,군산등주요물산거점의상인들이중심이되었던토착상업자본이있다.
정도의차이는있지만,앞의두경우가식민지지배체제의성립과정에서어느정도친일적속성을띨수밖에없었던반면,각지역의토착상업자본세력은3·1운동이후전국적으로전개된‘물산장려운동’의저변을형성하는등민족자본의맹아가될가능성을가진집단이었다.
실제로1920년평양에서조만식을중심으로<조선물산장려회>가발족하면서이운동의모태가된다.
유일한의부친유기연은상인특유의진취성과민족주의적성향을지닌토착상인세력전통의한복판에있었던인물이라고할수있다.


아울러 유기연은 ‘평양에 거주하던 기독교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은 한반도에 개신교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보루에 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특히 평양은 현재 우리나라 장로교단을 대표하는 유수의 신학대학들이 그 기원으로 삼고 있는 ‘평양신학’이 설립된 곳이다.
미국의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마펫(S.A. Moffett)이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몇몇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학반을 개설한 때가 1901년, 바로 유기연이 평양에서 그 유명한 싱거(Singer)미싱 대리점을 하고 있을 때이다.
기독교도 유기연은 선교사들과의 교류 속에서 서양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에 놓여 있던 한반도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아들을 ‘우월한 문명의 세계’로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지금의 관점에서야 서구 문명에 편향된 의식의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유기연은 ‘하나님의 제단에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장남을 문명 세계에 보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유일한의 미국행은 그의 부친 유기연의 진취성, 민족주의적 정서, 기독교인 특유의 희생과 결단,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일종의 ‘거사’였다.
유일한이라는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의 뿌리에 아버지의 치열했던 고민과 결단이 있었던 것이다.
유일한이 그 넓은 미국 땅에서 하필 네브래스카로 가게 된 까닭을 살펴보면, 당시의 비장감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지도를 펼쳐놓고 보라. 정중앙이 네브래스카다.
그들은 미국에서도 한복판으로 가야 서구문명을 보다 확실하게, 제대로 접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들의 황당함일까? 오히려 세계사의 격랑 속에서 주변부로 전락한 식민지 민중들의 처절한 오기가 느껴지지는 않는가? <헤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무장 독립투쟁 노선에 입각하며, 독립군의 장교가 될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해 1909년 미주 지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근대식 군사학교이다.
이 학교가 바로 네브래스카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지향하는 많은 진취적 인사들이 ‘정중앙’이라는 이유로 몰려든 곳이 네브래스카였고, 그런 열기가 있었기 때문에 소년병학교의 설립까지 가능했던 것이다.
유일한은 이 학교의 1기 구성원이었다.
그 분들의 진지함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9살 소년 유일한이 평양을 떠나 인천을 거쳐, 화륜선을 타고 몇 달에 걸친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다시 네브래스카까지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지면의 한계상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동안 당시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사건이 있었고, 소년은 그에 대응하고 적응해야 했다.
그 기간은 알에서 깨어나 성체가 되기 위한 부화의 시기이자, 연단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식축구부서 활약, 학교 안 ‘짱’ 되기도 유일한은 선교사의 주선으로 네브래스카 주의 커니라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던 이사벨과 엘리자베스라는 자매의 집에 거처를 정한다.
독실한 침례교도였던 두 자매는 결혼을 하지 않고, 유일한을 아들처럼 돌봐주었다고 한다.
당시 네브래스카 일대에서는 대륙횡단 철도 노선의 건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독일계와 스웨덴 등 북유럽 출신 그리고 중국 이민들이 노동력을 공급하는 주요 원천이었다.
소년 유일한은 이러한 인종의 용광로 속에 적응하며, 네브래스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 미시간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유일한은 미식축구부의 쿼터백으로 활약했다.
이는 유일한이 다양한 인종의 결집체인 미국 사회에서 핵심의 위치에 접근했음을 의미한다.
식민지 출신의 동양인 소년이 요즘 말로 학교 안의 ‘짱’이 된 것이다.
*다음호 숙주를 팔아 30만달러를 벌다 - 벤처기업가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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