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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책 속에 진정한 휴식 있다
[라이프] 책 속에 진정한 휴식 있다
  • 강성민
  • 승인 2005.07.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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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良書)와 함께 2005 여름 나기 역사 |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지음, 한길사 펴냄, 2만2천원 제목:한국 현대사에 대한 가장 ‘명확한’ 기억 저널리즘이 압제된 개발독재 시대. 몇 안 되는 정론직필 언론인이자 지식인 중 한 명인 리영희 선생의 회고록이다.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처음 읽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기억처럼, 리영희 선생의 글은 ‘운동권’뿐만 아니라 그 시대 젊은이들 대부분에게 세계의 진실을 충격적으로 알려줬다.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그를 ‘의식화의 원흉’으로 간주하게끔 한 숨은 힘인 셈인데, 이 책 속에는 어떻게 그가 그렇게 독보적인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이 잔뜩 등장한다.
뇌출혈 후 몸이 불편한 그를 위해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이 대화 파트너로 나서서 몇 년간 얘기를 나누고 쓰기를 반복한 끝에 나온 이 책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가장 ‘명확한’ 기억이라고 할 만하다.
리영희 선생의 기억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우리 사회의 다른 원로들과는 다른 점을 느끼게 된다.
그는 과거를 매우 정확하게 기억할 뿐 아니라, 매우 구조적으로 기억한다.
역사가의 기억도 허구라고 하는 판에 개인의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진실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는 어떤 사건에 대해 기억할 때 모든 정황들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해 냄으로써 그 사건의 역사적 메시지를 이끌어낸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면 장면들이 모두 곡진한 삶의 흔적과 지식인으로서의 고민이 담긴 대목이지만, 1968년 김수영과 이어령 간에 벌어졌던 ‘순수문학-참여문학’ 논쟁에 대한 회고는 특히 눈길을 끈다.
당시 <조선일보>에 몸담았던 리영희는 편집국장 자리에서 큰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거기 김수영이 원고를 들고 서 있었다.
당시 편집국장은 소설가 선우휘로, 그는 문협 정통파의 순수주의, 즉 이어령식의 자유주의적, 근대주의적 순수문학이 아닌, 우익적 문학관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선우휘가 김수영에게 민감한 구절 몇 자를 고치자고 했으니, 그 꼬장꼬장한 김수영이 펄쩍 뛰었던 것이다.
김수영이 “이어령에게도 원고를 고치라고 했냐”면서 “당장 <한국일보>에 원고를 가지고 가서 이 같은 뒷 사연까지 보태서 싣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선우휘가 겨우 달래서 진정시킨 사건이다.
리영희는 이 사건을, 김수영의 원고를 받아서 그걸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던 이어령에게 보여줬고, 거기서 수정 지시가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문에 나기도 전에 논쟁의 당사자에게 보여주고 먼저 수정을 요구했던 것은 엄연한 반칙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 같은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이 논쟁을 기억하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야기에 이어서 정말 핵심적인 사연이 나오는데, 그것은 김수영을 계기로 해서 리영희가 문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수영, 김정한, 신동엽 등의 작품을 찾아 읽으며 홀로 감동받기를 거듭하던 끝에 리영희는 잡지 발행인과 필자 사이로 알고 지내던 백낙청 교수를 찾아서 신동엽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얼마 전에 죽지 않았소”라는 답을 듣는다.
그만큼 그가 문단 소식에 어두웠다는 점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기 관심 분야인 정치·경제·사회 이슈에 그가 몰두해 있었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그 후 리영희는 김수영을 만나고 싶어서 벼르고 있던 차에 친한 친구이던 소설가 이병주에게서 “나 때문에 김수영이 죽었다”고 하는 어이없는 얘기를 들었다.
그 전날 이병주 등과 술을 마신 김수영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던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도로 위를 갈지자로 걸어가다가 그만 버스에 치었던 것이다.
이 일을 원통해한 리영희는 그 이후부터 자기가 마음에 둔 사람은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만나는 습관을 지니게 됐다.
‘사하촌’(寺下村)으로 잘 알려진 원로 작가 김정한 선생을 <창작과비평>에 글을 실어 받은 원고료를 들고 찾아가 큰절을 올리고 일식집에 가서 대접했다는 기억이 뒤이어 나온다.
문학 |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 김윤식 지음, 솔 펴냄, 9천원 제목:근대문학 묘지기의 교토 문학 기행 이야기를 꺼낸 김에 문학 얘기를 좀 더 하자면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의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을 꼭 권하고 싶다.
근대문학의 ‘묘지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근대문학에 대해 수많은 연구저서를 낸 김윤식 교수는 이 연구과정의 부산물이라고 할 만한 여행기를 많이 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교토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창작된 식민지 시기 문학의 숨결을 느껴보려는 한 실증연구자의 정열적인 문학사랑을 만날 수 있다.
교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나, 현지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김윤식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정지용, 염상섭, 이양하 등의 문인들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교토적인 감각’이다.
정지용의 샐쭉하면서도 화려한 모더니즘 감각, 고향과 연관된 비애로운 정서의 기원 일부를, 교토에서의 삶에 대한 시인의 노스탤지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저자는 정지용이 공부한 대학을 찾아가 그의 성적표를 떼어본다.
그가 KAPF 문인 김환태를 데려가서 시 ‘향수’를 읊어주었다던 쇼코쿠지 뒤의 묘지 가는 길을 걷는 저자는 시간을 견디고 남아 있는 길과 냇물, 그리고 기억과 범벅이 되면서 코끝을 스치고 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교토 여행을 마칠 무렵 김윤식은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지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윤식에게 ‘미의식’의 다른 말이었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황홀함의 감정이 아니라, 육체적인 피로감과도 비슷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저자의 이 같은 은밀한 감정을 모두 느낄 수는 없지만 아래와 같은 인용문에서 그 종류는 얼핏 짐작할 것도 같다.
적어도 문학을 안다면 말이다.
“내 피로감은 무엇이었을까. 교토가 그것. 교토가 나를 그럴 수 없이 피로케 했던 것이다.
그것은 기요미즈데라(淸水寺)도 쇼코쿠지(相國寺)도 아니었고, 니시다 철학도 히에이 산의 절들도, 오하라(大原)의 이끼 낀 절 뒷마당도 동백꽃도 아니었다.
염상섭, 이장희, 오상순, 정지용, 이양하 그리고 윤동주 때문이었다.
그들의 문학적 감수성에 혹시 하이안조 천년 고도(古都)인 교토스런 감각이랄까, 뭐 그런 것이 스며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에서 오는 피로감이 아니었을까.” 자연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전영우 지음, 현암사 펴냄, 1만9500원 제목:전통 문화의 아이콘에 대한 감칠맛 나는 보고서 김윤식이 감수성의 기원을 찾아 문학기행을 떠났다면, 소나무 박사인 전영우 국민대 교수는 전국 방방곡곡의 소나무 숲을 따라 생태기행을 떠났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는 소나무에 대한 역사적, 생태학적 지식을, 직접 국토를 돌며 접한 생생한 현장과 버무려서 내놓은 맛난 요리다.
때마침 소나무 에이즈라 불리는 재선충병이 경북 포항에서 점점 북상하고 있어 소나무의 전멸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소나무의 존재와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책이다.
재선충병은 일본의 소나무를 전멸시켰고, 중국에서 우리나라 면적만큼의 소나무숲을 없애버린 무서운 병이다.
일단 이 병균이 소나무에 침투하면 치사율 100%인 탓에 중국 정부는 관광지로 유명한 태산의 소나무 절경을 보존키 위해 반경 80km 안의 소나무를 얼마 전에 모두 베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숲의 다른 생물들이 죽는다는 이유로 방제를 반대하는 환경단체들과 정부부처 간의 갈등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안타깝다.
전 교수는 이 책에서 소나무의 역사, 삶, 환경의 순서대로 우리가 잘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소나무는 중생대 말기인 1억7천년경 전에 지구상에 나타나 1백여종을 이루고 있다.
현존 식물로서는 꽤 고참이다.
외국에서는 최고 80m까지 자라지만, 국내에서 가장 키 큰 소나무는 강원도 인제에서 발견된 40m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왕조가 유일하게 지정한 보호수였는데, 그만큼 소나무는 땔감으로 으뜸이자, 건축재로도 널리 사용됐다.
백성들은 그 대신 참나무 같은 활엽수를 베어서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이 덕분에 한국의 산에는 온통 소나무숲을 이룰 수 있었다.
소나무는 활엽수들 틈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주변정리를 사람들이 알아서 해주니 맘 편히 자랐던 것이다.
그런데 좋은 날은 다 지나갔다.
나무를 떼지 않는 요즘, 활엽수가 다시 생태계의 질서에 따라 번식함으로써 소나무 숲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는 과거 우리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회화의 소재로도, 장수를 상징하는 나무로도, 건축재로도, 땔감으로도 소나무는 주인공이었지만, 과거의 전통이 생활의 영역에서 추방되듯 소나무와 우리의 연관도 그와 함께 점점 옅어져 가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요즘 주가가 높이 올라간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시리즈를 본 사람이라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그려진 그 기품을 느껴본 이라면, 휴양림에 조성된 소나무 숲에서 삼림욕을 즐겨본 이라면 소나무의 쇠퇴는 무척 슬픈 일이리라. 필자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김경인 인하대 교수는 소낭구만 십여년을 그려온 화가인데, 소나무를 그리기 위해 절과 절을 찾아 떠돌던 그의 여행담을 들었던 것이 이 책을 읽으며 귓가를 자꾸 스쳐간다.
우리의 삶은 이렇듯 사라지는 것들의 아픔을 거느리고 있다.
올여름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주변에 조성된 소나무숲이나, 아니면 경주 계림에라도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올 요량이다.
예술 | 말하기의 다른 방법 존 버거·장 모르 지음, 이희재 옮김, 눈빛 펴냄, 1만6천원 제목:사진예술 읽기에 보탬이 되는 참고서 요즘 미술시장이 쇠퇴하면서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문적인 사진가들도 점점 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사진기의 보급률에 비례한다기보다는 사진이라는 표현양식이 갖는 특수성에 우리가 친화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약호(code) 없는 메시지와 대면하였다”는 데서 짐작이 가능하다.
사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찰칵 찍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림은 그 안에 시간을 담고 있다.
화가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림은 자신이 표현되는 동안의 시간과는 별개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진에 담긴 시간은 그 사진이 보여주는 대상의 한 순간일 뿐이다.
이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말하기의 다른 방법>이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버거는 고품격 예술 에세이로는 스탕달과 보들레르, 발레리에 비견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진은 모습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온다”라고 말한다.
장 모르는, 사진은 순간의 포착이기 때문에 매우 시간적인 예술이라는 역설을 주장한다.
가령 역의 플랫폼에서 전쟁에 떠나는 병사와 포옹하고 있는 그의 연인의 사진을 보자. 이 사진에서 우리는 그 병사가 곧 떠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과 차림새에서 과거의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읽어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사진이 그림과 갖는 차이가 아닐까. 그림에서 우리는 그 동심원적 공간이 표현하고 있는 완결된 미적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할 뿐, 그 작품의 전사(前史)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화나 춤 같은 예술을 접할 때에도 스쳐지나가는 몸짓과 스토리를 따라갈 뿐이지, 그 개별적인 순간들의 앞뒤에 대해서 자세하게 사색할 시간은 없다.
그러나 사진은 삶의 특정한 한 시점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이모저모를 생각하길 강요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현대성의 명확한 관찰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지 파괴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한 반미디어적 매체로 ‘사진’을 강력하게 거론한 바 있다.
“사진은 침묵으로 소음에 저항하고, 부동자세로 가속에 저항하고, 비밀을 통해 정보의 분출에 저항하며, 무엇보다 이미지의 끊임없는 연속에 저항한다”라면서. 과학 |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승산 펴냄, 2만8천원 제목:사고의 빅뱅을 몰고 올 현대 물리학 길라잡이 사진이 태어난 것은 확실히 오래되었지만, 그럼에도 영화나 여타 첨단예술보다 더 신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게 다가오는 측면이다.
사진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사진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아주 미세한 정신의 운용이 필요할 듯하다.
그런 느낌의 연장선상에서 <우주의 구조>를 대할 때 독자들은 아마 빅뱅적 전환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원래 우주는 손톱보다 작은 점 상태였다가 폭발을 하면서 100만×1조×1조 분의 1초 사이에 100만×1조×1조배 이상 팽창해서 지금의 우주가 이뤄졌다는 ‘인플레이션 우주론’이 1980년대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고 말해준다.
이 책의 저자는 저 유명한 <엘리건트 유니버스>에서 ‘초끈이론’을 유려하게 설명해서 명성을 얻은 브라이언 그린이다.
초끈이론이란 물체를 이루는 최소단위의 구성요소가 전자와 쿼크가 아니라, 이보다 100×10억×1억배나 작은 가느다란 끈으로 이뤄져 있다는 발견을 기초로 해서 작성된 이론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인 이 초끈이론 덕분에 거시적 우주의 물리적 현상을 다루는 ‘일반 상대성 이론’과 미시적 공간에서의 물리현상을 다루는 ‘양자역학’이 서로 한자리에서 만났을 때 일어나는 방정식의 대혼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주의 구조>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하기까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갔는지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설명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일반적인 용어를 통해서 어려운 과학적 구조를 이해시킨다는 것인데, 그에 대해서는 세계 유수의 글쟁이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 책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읽어보는 것이 최고이지만, 다음과 같은 독자서평도 참고할 만하다.
“대부분의 책들은 내용의 80% 정도만을 설명한 후 어렵고 추상적인 부분에 도달하면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한 채 결론을 내려버리지만, 브라이언 그린은 적절한 비유를 들어가며 모든 내용을 100%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의 상식을 넘어서, 과학적인 진실을 만나고자 하는 분들은 한번씩 구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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