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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선임연구원
[특별기고]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선임연구원
  • 이상헌
  • 승인 2005.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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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경제 성장-고용 창출’ 등식 깨져 ‘괜찮은 일자리’ 고민할 때 한때 세계를 흥분시켰던 세계화-경제 성장-고용 창출이라는 황금등식을 바라보는 눈빛이 최근 싸늘해진 듯하다.
2000년대 들어 속속 발표된 실증연구들은 한결같이 실망스런 결론을 내놓고 있다.
세계화가 경제 성장을 가져온다는 증거도 부족하고, 경제 성장이 고용 창출을 가져온다는 ‘상식적인’ 논리도 실증적으로 의문스러워지는 상황이다.
세계화가 고용 창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골고루 나누어줄 것이라는 기대도 장밋빛 환상이었던 셈이다.
최근 세계화 관련 연구를 포괄적으로 검토한 한 논문은 아예 제목을 ‘자기기만’(fooling ourselves)이라 붙이고 경제학자들의 ‘자기 반성’을 촉구할 정도다.
10여년 전에 “이데올로기와 수사는 넘치고 분석과 증거는 부족하다”고 개탄한 하버드 경제학 교수 리차드 프리만(Richard Freeman)의 말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물론 세계화 관련 논란이 ‘잃어버린 20년’과 함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사실 시장, 성장, 교역, 자유화 등과 같은 추상적인 말과 이와 관련된 국가 평균 통계로 채워져 있는 세계화 관련 논의를 이제는 개별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 수준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있다.
설혹 국민경제가 10% 성장하고 국가경쟁력 순위가 두어 단계 올랐다 하더라도 실업률은 여전하고 개별 노동자들의 삶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면, 많은 이들에게 가공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따라서 보다 생산적인 현실적인 논의와 정책 개발을 위해서는 “추상과 평균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반세계화 정서를 히스테리나 기득권 집단(특히 노동조합이나 농민단체)의 반발로 폄하하기 전에, 일반 시민들은 일자리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서 세계화를 이해하고 평가한다는 다소 상식적인 관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ILO가 제시한 ‘괜찮은 일자리’ 개념은 그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점을 사회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근거가 확실하다 할 수 없는 국가경쟁력 순위 변화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데는 둔감한 현상에 대해 보다 진지한 사회적 성찰과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고용의 질이 이차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고용의 질 2차적인 문제 아니다 물론 고용의 질을 강조하노라면, 대규모 실업의 존재를 들먹이며 ‘한가한’ 얘기로 치부해 버리는 반론과 맞닥뜨린다.
당장 일자리을 찾아서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할 뿐, 고용조건은 이차적이라는 얘기 말이다.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 프랑소와 부르귀뇽(Francois Bourguignon)도 최근 지적했듯이, 개발도상국에서는 고용과 실업 간 차이가 그리 분명하지 않다.
실업은 ‘사치’이며 거리에 나가 품팔이라도 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 나라에서 총 고용량은 신규 노동시장 진출자 숫자만큼 증가한다.
따라서 고용량의 변화를 살펴본다 하더라도 어떤 형태의 고용이 사라지고 생겨나는지에 대한 분석이 실제로 중요하다.
선진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노동시장 유연성과 노동계층의 다양화로 인해 다양한 고용형태가 생겨나고 있고, 신규 고용 창출이 고용조건 악화를 동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여성, 고령층, 청년층 등과 같은 취약계층에서 이러한 경향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사회통합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 고용과 관련된 세계 각국의 고민도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다.
고용의 질을 개념화하고 측정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노동행위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하고 모니터링 대상이 되는지를 선험적으로 선택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국제적 차원에서 고용의 질을 논의하는 일은 보다 복잡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해당기관의 철학이나 정책적 지향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통계지표가 개발되고 있다.
ILO가 최근에 실험 중인 ‘괜찮은 일자리’ 지표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unacceptable) 노동을 하고 있는(따라서 decent 하지 않은), 또는 ‘이러한 노동조건을 가진 노동형태에 일하기 쉬운’ 취약그룹이 어느 정도 규모로 존재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 통계적 평균보다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 있는 계층의 규모와 분포가 더욱 중시된다.
2002년 말에 11개 분야에 걸쳐 아동노동, 장시간 노동, 저임금 노동, 임시노동, 여성 취업, 산업재해 등에 관련된 총 29개 지표가 제시되었고, 이에 근거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개념적 적실성과 통계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 지표가 제시된 이후 다양한 논쟁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고, 주요 의사 결정권을 가진 이사회에서는 일부 그룹들(특히 사용자 그룹)이 지표 개발 자체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태다.
UN의 인간개발지표처럼 각국에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사용될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리가 강한 듯하다.
개념과 통계 문제도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고용 안정성’은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이 매우 중시하는 사항이지만, 이를 수량화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현재로는 2가지 지표만이 고려되고 있다.
고용 안정성 문제는 정의상 미래의 고용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느냐 하는 점과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 고용 안정성을 측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과거 고용 패턴을 통해서 고용 안정성을 측정해 보자는 취지에서 재직기간(job tenure)이 ‘1년 미만인 임금노동자 비율’이라는 잣대가 제시됐다.
물론 재직기간이 1년 미만인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성이 낮지 않을 수도 있고(예를 들어 정규직에 최근 취직한 청년), 재직기간이 길다고 해서 고용 안정성이 높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고용계약 형태가 임시고용(temporary work)인 노동자 비율을 분석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임시 임금노동자 비율’ 지표도 이런 맥락에서 제시되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각국마다 임시노동자의 통계상 정의가 달라서 국가간 비교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고용 비율을 예의주시하는 까닭은, 임시고용이 단지 고용 불안정뿐만 아니라 저임금, 훈련기회 부족, 높은 노동강도, 장시간 노동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열악한 계층에 초점을 맞추고 모니터링한다는 점에서 ILO 지표는 네거티브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유럽집행위원회(EC)는 양질의 고용이 지속 가능하고 효율적인 경제에 핵심적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포지티브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현재 10개 분야에 걸쳐 수많은 지표들이 선정되어 EU 단위의 대규모 통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시간, 고용계약 형태, 임금 등과 같은 전통적인 항목뿐만 아니라 비정규노동, 노동자 참여, 직무 전환 등과 관련된 분야도 포괄하고 있다.
ILO 지표가 국제협약과 관련되어 있다면, EC 지표는 각종 훈령(Directives)나 고용전략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지표들을 보면, ILO와 EC 지표 간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현재에는 두 기관이 공통지표 개발 가능성을 실무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정확한 실태 파악 선행돼야 고용의 질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정확한 실태 파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책적 초점이 변하면 통계도 변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고용의 질이 중요하다면 그 변화를 관찰하고 판단할 통계적 수단이 필요한 것이다.
고용의 질에 관한 한 선구자를 자처하는 스웨덴은 30여년 동안 노동자 생활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오고 있다.
경제지표만 있고 일반 서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사회지표는 왜 없느냐는 불만이 70년대부터 터져나와 고용의 질에 대해 치열한 사회적 논쟁을 해온 덕분이다.
올해 조사 결과 보고서의 결론(90년대에 걸쳐 나빠진 고용조건은 2000년대 들어 드디어 악화 조짐은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이미 악화된 노동조건을 어떻게 다시 개선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은 비관적이지만, 이러한 ‘30년 관록’을 은근히 보여주는 탓에 다른 국가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U 전 회원국을 상대로 실시되는 유럽 근로조건 조사도 고용조건 변화를 분석하고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고용의 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은 나라에서는,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이와 유사한 조사를 체계적으로 실시하는 방법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 구조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개별적인 노동자들이 처한 고용상황이 분화되는 만큼, 보다 정확하고 적실한 통계에 입각한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도 높다 할 것이다.
* 이 글에 제시된 견해는 필자 개인 견해이며 ILO의 공식적 견해를 반드시 반영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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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장, 성장, 교역, 자유화 등과 같은 추상적인 말과 이와 관련된 국가 평균 통계로 채워져 있는 세계화 관련 논의를 이제는 개별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 수준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있다.
설혹 국민경제가 10% 성장하고 국가경쟁력 순위가 두어 단계 올랐다 하더라도 실업률은 여전하고 개별 노동자들의 삶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면, 많은 이들에게 가공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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