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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따로와 끼리-남성 지배문화 벗기기> 정유성/책세상
[서평] <따로와 끼리-남성 지배문화 벗기기> 정유성/책세상
  • 권형란(편집팀장)
  • 승인 2001.06.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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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 하자, 남자들도 같이
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벽에 붙어 있는 술 광고 포스터를 발견했다.
카피가 인상적이다.
‘한잔 하자, 남자 빼고.’ 괜찮은 문구라서 기분이 유쾌해졌다.
어느 자리나 마찬가지지만 남자들은 성격이 남다른 몇몇을 빼고는 항상 주인공이 되려고 든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자리이든 판을 주도하려고 한다.
여자들이 나누는, 사소하게 보이는 주제와 방만한 듯 보이는 말하기 방식들을 우습게 여긴다.
면박주기, 비웃기, 소리지르기, 자기들끼리 통하는 주제로 독점하기 등으로 여자들의 입을 막아버린다.
대신 남자들은 불행히도 여성과 소통할 통로를 잃어버렸다.


여자들은 이제 ‘남자는 빼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여자가 어딜…’ 하는 윽박지름을 벗어나 조곤조곤 속삭이듯, 그러나 인간관계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는 여자들의 ‘성’에 대한 이야기가 틈새를 뚫고 나오고 있다.


여성들은 정말 성을 즐기는가 “나도 여자란 말야. 남자랑 나란히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라도 하고 서로 쓰다듬기라도 하고. 눈이라도 마주쳐야 무슨 정열이 나든 정염이 일든 그럴 거 아냐. 속된 말로 이건 무슨 소뼈다귀 보고 달려드는 개새끼 모양 덮치는 놈들한테 뭔 성욕이 일겠어.” “첫 경험이었지만… 에로틱한 정서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그냥 뻣뻣하게 누워서 몸만 대준 거였죠. 아무 느낌이 오지 않았어요.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였죠. 그런데 왜 같은 일을 되풀이했냐고요? 그때는 정말, 꼭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어요.” “결국 남자 행세를 하며 똑같이 굴어요. 서두르며 자기 혼자 씩씩거리고, 그런 다음 돌아누워 잠이 들어요.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눈물이 쏟아지고 너무너무 추웠어요. 팽개쳐진 물건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주 작은 차이>(이프 펴냄)에는 성에 대한 여성 15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다른 여성들이 똑같이 고백하는 것은 충격적이게도 ‘나는 불감증’이라는 사실이다.
이 여자들은 ‘으레 그래야 하는 것이려니’라고 교육받은 탓에 실상 자신이 원하지도 않으면서 남성이 원하면 다리를 벌려준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몸을 대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떠날까봐 애면글면하고, 심지어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잘못이라고까지 믿어버린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져 ‘여자도 성욕이 있다’거나 ‘여자도 성을 자유롭게 즐기라’라는 새로운 주문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질 오르가슴 신화를 맹신하는 남성들은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을 말하는 여성들을 성적으로 미숙하다고 밀어붙여, 성적인 해방을 누려보기도 전에 심각한 불감증에 시달리게 했다.
여성들은 ‘거시기’만 줄기차게 삽입하는 남성들을 거부하고 정서적 따스함과 인간적 유대감을 깊게 하는 섹스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남성들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아내라는 이유로, 창녀라는 이유로 아무 때나 여성에게 섹스를 강요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 출간될 당시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까지 충격을 받아 뭇 남성들의 침대 매너를 바꾸게 했다는 이 책이 우리나라의 남성과 여성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사실 책 제목인 ‘아주 작은 차이’는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말이다.
“여성 해방? 좋지. 누구라도 무슨 족쇄에 묶여 있다면 하루 빨리 풀려나야지. 하지만 그게 꼭 남녀가 구별이 없는 쪽으로 가야 한다면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여자와 남자 사이에 아주 작은 차이도 남겨놓지 않고 모두 없애버리면, 그건 좀, 세상이 너무 좀 그런 거 아냐?” 저자 알리스 슈바르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점을 문제삼으려 한다.
아주 작은 차이. 이게 대체 무엇이길래 어떤 남자도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 그 차이가 대관절 왜 그렇게 중요하길래 어떤 인간도 그냥 인간일 수가 없고, 반드시 여자 아니면 남자여야만 하는가.” 불알은 있어도 보지는 없다? 2001년에도 사진관 문 앞에는 자랑스럽게 ‘불알’을 내놓은 작은 사내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고, 여자아이들은 자신의 ‘그곳’은 숨겨야 하거나 드러내면 큰일나는 것으로 알고 자라난다.
여대생들이 백주대낮에 월경축제를 열고, 멘스를 시작한 딸에게 축하파티를 열어주는 엄마 아빠가 있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불알은 내놓아도 괜찮고 잠지는 감추어야 하는 상황까지 바뀌진 않았다.
아무리 양성 평등과 성적 주체성을 부르짖어도 여성의 성기는 입에 올리기도 부자연스럽고 꺼림칙한 곳으로 남아 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북하우스 펴냄)는 말 그대로 ‘보지의 독백’ 혹은 ‘보지는 말한다’이다.
밑, 아래, 거기, 잠지 등 모호하게 불리는 여성의 성기가 당당하게 ‘보지’라는 제 이름으로 말을 시작했다는 것은 환호할 만하다.
사실 남자 앞에서 성에 관한 웬만한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을 수 있는 나 자신도 이 말만큼은 쉽게 할 수 없다.
그건 수줍어서가 아니라 단어 자체의 뜻이 너무나 오염되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신문사의 북리뷰난에 ‘보지’라는 단어를 썼다고 편집진에서 무어라 말들이 많았다는 후문도 있는 걸 보면 우리 스스로 ‘보지’에 대한 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책 역시 <아주 작은 차이>처럼 여러 여성들의 성적 체험을 담고 있지만 ‘버자이너’가 직접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제목의 느낌처럼 쑥스럽거나 충격적이진 않다.
대신 굉장히 슬프다.
시대에 따라, 남성들의 시선에 따라 이리저리 내돌려지는 여성의 몸. ‘보지’에 가해지는 숱한 정신적, 물리적 폭력은 차마 읽을 수 없을 정도다.
거의 한번도 제 몸에 달려 있는 그것을 직시하지 않는 여자들에게 ‘아침마다 거울로 얼굴을 보듯 성기를 들여다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음모가 싫다는 남편 때문에 면도칼로 털을 밀어버린 여성이 피가 맺히는 아픔을 참고,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의사의 처방대로 해주는 섹스가 있는가 하면, 한 여성은 좋아하는 남자와 키스를 하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차 시트를 적시는 바람에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차를 버려놓은 년’으로 버림을 받고 ‘거기’를 자진 폐업해버리기도 한다.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여성의 말이 있는가 하면, 보스니아 강간캠프에서 처참하게 능욕당한 여성의 말도 있다.
그들의 독백을 듣는 것은 물론 고통스럽다.
그러나 “내 보지는 물에 잠긴 채 살아 있는 마을이야. 그들은 우리 마을에 쳐들어와 도살하고 불태워버렸어. 난 다시는 그곳을 건드리지 않아. 찾아가지도 않아. 그곳이 어딘지는 나도 몰라”라는 슬픈 고백은 <아주 작은 차이>에서 나오는 젊은 여성들의 모임 ‘스스로 돕기회’의 ‘이제 우리 몸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는 선언과 같은 무게의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 모임에서는 우리 몸의 부끄러운 부분으로 잘못 알고 있던 이른바 ‘치부’가 결코 부끄러운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서로 만져보고 들여다보면서 자연의 섭리대로 이루어진 중요한 신체부위라는 점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결코 부끄러운 부분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인격체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것이 눈물의 고백이건 패배의 시인이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다.
여자에게 말 거는 남자들 여성들이 어렵게 입을 열어 ‘성’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남성들도 댓거리를 해오긴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건 ‘말’이 아니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욕들로 저들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남성들 때문에 사실 그들의 말에 회의를 갖게 된다.
서글픔과 절망을 안겨주는 말에 너무 깊이 데여, 정말로 그들은 우리와 같은 생각과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종’이 아닐까 싶은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남성 자신의 성에 대해서, 여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걸기를 시도하는 남성을 만나면 참으로 반갑다.
정유성씨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그의 책을 읽는 일은 남성들에 대해 갖고 있는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해주어 고맙기까지 하다.
정유성의 <따로와 끼리-남성 지배문화 벗기기>(책세상 펴냄)는 여성들의 수평적 말하기 방식과 고백투 글쓰기 방식과는 좀 다르다.
여전히 소통의 구조로서 설득보다는 주장을, 이해보다는 가르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렇긴 해도 남성 스스로 왜 자신들이 위기에 처한 아버지가 되었는가, 왜 고개 숙인 남성이 되어 엄살과 어리광을 부리며, 또다른 방식으로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스스로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특히 정유성씨는 남성 중심적 성문화가 여성과의 관계를 망가뜨리게 된 상황을 아주 올바르게 고백하고 있다.
남성의 성욕구는 제어할 수 없다는 그릇된 믿음, 여성에게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것은 남자여야 한다는 성적인 우월성과 폭력성, 여자는 사실 강간에서 쾌감을 얻는다는 식의 오도된 그들만의 성 문화와 의식이 남성을 ‘짐승의 본능’만을 가진 사람으로 떨어뜨렸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 크다.
<아주 작은 차이>와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 그토록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여성들이 마지막에 힘주어 말하던 남성들의 잘못된 성관념 부분에 대한 화답이라 할 만하다.
과도하게 왜곡된, 남성적이고 폭력적이며 일방적인 성문화가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까지 소외시켜버렸다는 것이 세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 핵심인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내 이야기일 수 있다.
어느 순간 알 수 없이 관계가 뒤틀려버린 파트너가 있다면 이 책들을 읽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해보면 어떨지. 남과 여는 사실 생식기의 아주 조금 다른 생김새 빼고는 아주 똑같은 인간이라는 깨달음만 얻어도 남은 생 동안 맺는 관계가 도타워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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