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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괴물을 종이 호랑이로 잡는다?
투기괴물을 종이 호랑이로 잡는다?
  • 손낙구
  • 승인 2005.09.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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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 대책, 세금장기판선 차·포 떼고 개발정책은 투기 부채질하는 꼴 50년 넘게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는 부동산 투기라는 ‘괴물’은 사납고 힘이 셀 뿐 아니라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이 ‘괴물’은 대략 10년에 한 번씩 어김없이 출몰해서 전 국토를 헤집고 세상을 어지럽혀 왔는데, 박정희 정권 때인 1960년대 말과 70년대 말, 노태우 정권 때인 80년대 말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대통령은 당초 정부가 발표할 8·31 부동산정책을 맹수 중의 맹수인 호랑이에 비유하며 강력한 대책이 나올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그렇다면 8·31 부동산대책은 과연 투기 괴물을 잡을 만큼 강력한 ‘호랑이’인가. 정부는 분명 호랑이를 그렸다며 “부동산 투기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상당수 국민들과 전문가들은 ‘고양이’로 보인다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8·31 대책은 과연 투기괴물을 잡을 호랑이인가, 아니면 쥐나 잡을 고양이인가. 8·31 대책은 외형상으로는 정책의 기본 방향, 서민주거 안정정책, 부동산 거래 투명화 정책, 주택·토지시장 안정대책 등 다양한 영역을 망라한 모양을 띠고 있다.
하지만 알맹이는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세로 대표되는 세금제도 개편과 송파 신도시로 상징되는 공급 확대 개발정책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바꿔 말하면 투기억제책인 세제 개편과 투기촉진책인 개발정책이 서로 어깨동무한 기묘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투기를 잡겠다면서 투기를 부추기는 신도시개발정책을 발표한 것은 결국 참여정부가 투기로 이익을 보는 기득권 세력에게 밀린 것이지만, 바로 며칠 전 정부가 발표한 통계만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통계를 보면 주상복합 오피스텔이나 연립주택 등을 계산에 넣지 않고도 주택보급률이 100%가 넘어섰는데,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이것은 주택 공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집부자들이 많게는 수십, 수백채씩 차지하고 있는 부동산 소유 빈부 격차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는 얘기이다.
인구의 1%에 불과한 땅부자 48만명이 국토 사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전체 세대의 1%인 17만세대가 사유지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는 땅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강남권 한가운데에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정부 정책은 투기로 불로소득을 벌어 다시 부동산을 사는 투기꾼들에게 새로운 투기무대를 선사하는 것이다.
세제의 상당 부분 다음 정권 때나 시행 더구나 바뀌는 세제의 상당 부분이 다음 정권 때나 시행할 수 있게 돼 당장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 반면, 개발정책은 발표되자마자 예정된 곳과 인근 지역의 아파트값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첫 삽도 뜨기 전에 강남·분당을 비롯한 서울 수도권에 투기 바람이 불어닥쳐 결국 중단됐던 판교의 악몽이 이번에는 강남권 노른자위 땅인 송파를 진원지로 해서 재현될 조짐이 나타나면서 투기대책이 투기를 부채질하는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개발정책을 앞세우지 않았다면 세제개편 내용 자체는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정의로 보나, 보유세 강화 거래세 인하라는 부동산 세제의 방향으로 보나 평가할 만한 점이 있다.
과세기준 인하·세대별 합산·2009년까지 과표적용률 100% 현실화 등의 종합부동산세 강화, 실거래가 과세·2주택자 중과세 등 양도소득세 개편, 법인의 비사업용 토지에 대한 특별부가세 세율 인상 등은 진전된 내용이다.
그러나 종합부동산세는 16만세대, 양도소득세 2주택 중과세는 28만세대 적용으로 밀리고, 없애겠다던 종합부동산세 상한선을 되살리는 등 막판 ‘세금장기판’에서는 차·포 다 날아가고 마 정도만 살아났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다.
이를 두고 ‘세금폭탄’ 운운해 온 부동산 부자와 그들을 대변하는 부자 언론도 문제지만, 결국은 이들에게 참여정부가 밀리고 만 것이다.
특히 실거래가 과세 기준을 확립한다면서 실거래가 확인의 최대 장애물인 1가구 1주택 비과세 제도를 그대로 둔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
실거래가를 알아야 세제를 비롯한 부동산정책의 출발점을 제대로 잡을 수 있는데, 양도주택의 절반에 대해서는 실거래가조차 알 수 없는 현 상황을 개선하지 않고는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
개발이익을 환수하기 위해 세제와 함께 개발부담금제를 부활하겠다고 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지만 개발이익 규모가 큰 재건축·재개발은 적용하지 않고 30개 토지개발사업에 한정하며, 부과율도 25%로 턱없이 낮은 데다 산정기준 시점도 땅값이 오를 대로 오른 사업 착수 시점이어서 제 기능을 할지 의문이다.
또한 생애최초주택자금지원제도 부활 등 서민지원책으로 발표한 몇몇 정책은 나름대로 필요한 것이나 효과가 제한적이어서 구색 맞추기용 발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8·31 대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한계는 투기를 잡겠다는 장수가 칼은 들지 않고 방패만 들려고 하는 점이다.
세금을 제대로 걷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세제는 투기의 결과에 대한 간접적인 방어수단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투기 규제 수단과 함께 사용할 때 효과를 볼 수 있다.
2개월에 걸친 부동산정책 공론화 과정에서는 주택 소유 제한을 포함한 토지주택공개념 전면도입 등 훌륭한 칼이 많이 나왔지만 정부는 이를 모두 외면했다.
80년대 말 투기 때 노태우 정권이 토지공개념 관련 3법을 동원해 부동산의 소유를 제한하고, 심지어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실상 강제로 팔게 하는 등 투기를 직접 타격하는 칼을 들었던 것과 비교해 봐도 방패만 들고 싸우는 노무현 정부의 선택은 이해하기 어렵다.
예전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나와서 ‘아파트 반값 공급’ 공약을 내세운 적이 있다.
분양원가를 공개하고 전국 어디서나 분양권을 전매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파트를 다 지은 뒤 파는 후분양제를 실질적으로 도입했다면, 또 공공택지에서 조성되는 모든 주택은 조건 없이 공영개발하는 원칙을 뚜렷이 확립했다면, 아파트값을 절반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참여정부와 여권의 선거공약이기도 했던 분양원가 공개는 8·31 대책에 담겨야 할 정책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는 등 국민적 성원이 높았던 만큼 이번이 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정부가 스스로 포기했으니, 이제 국회가 입법과정에서 분발하지 않는 한 분양가가 ‘낮은 곳으로 임하여’ 서민들 곁으로 다가오기는 어렵게 됐다.
국회 입법 과정서 그나마 후퇴할 우려 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국회가 정부안을 후퇴시키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미 한나라당은 부동산 부자들의 세금을 좀 더 걷자는 정부안에 대해 ‘너무 많이 내라는 것은 곤란하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고, 송파 신도시나 강북 뉴타운 개발도 모자라다며 신도시 개발정책을 더 늘려야 한다고 당론을 정했다.
몇몇 의원들이 분양원가공개, 주택소유 제한 등을 주장해 마치 한나라당이 부동산 투기를 잡는 데 앞장서는 민생정당인 것처럼 착시현상이 일어났지만,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열린우리당 안에도 한나라당과 같은 견해를 가진 의원들이 상당히 많고, 때는 바야흐로 참여정부가 한나라당에게 ‘상생의 대연정’을 하자고 공을 들이고 있는 마당이니 더 불안하다.
용케 국회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2007년 대선에 나선 거대 여야정당 후보들이 차·포 다 떼고 간신히 남은 ‘세금장기판’의 마까지 떼자고 앞다퉈 공약을 낼지 모른다는 시나리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쨌든 정부는 부동산대책 ‘팔삼일’을 내놓았고, 일전을 앞두고 있다.
투기괴물은 벌써부터 송파와 뉴타운을 비롯한 전국 곳곳 개발도시에서 불로소득을 포식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팔삼일’이 산천을 떨게 하는 “어흥∼” 소리를 내며 투기괴물을 보기좋게 쓰러뜨릴지, 아니면 꼬리를 다리 사이에 넣고 “야∼웅” 할지 아직 속단하기는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50년 넘게 대한민국을 떠도는 부동산 투기라는 괴물을 잡아 영원히 무덤에 묻지 않고는 나라경제도 국민생활도 엉망이 되고 말 것임을 대다수 서민들은 고통을 겪고 또 겪으며 몸으로 알고 있다.
화가를 바꿔서라도 ‘투기 잡는 호랑이 부동산정책’을 제대로 그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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