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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뚜앙떼리요르]사전전작제의 딜레마
[푸뚜앙떼리요르]사전전작제의 딜레마
  • 허준석 게임평론가
  • 승인 2005.10.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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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드라마 선택권이 크다.
다양한 채널을 보유한 케이블TV도 있으려니와, 합법적인 방법은 아닐지언정 인터넷을 뒤지면 외국 최신 드라마들의 파일과 누군가가 정성스레 달아놓은 자막까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이리저리 꼬여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가족사의 비밀도, 골치만 아픈 다각 관계도 싫지만, 그래도 드라마가 주는 매력을 피할 수 없다면 도피처는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비틀리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로 뒤얽힌 관계들만 우리를 신물 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드라마에선 도통 전문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변호사들이 사랑 싸움에 열을 올리며, 보직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실장들 역시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잘 조율된 정치 판타지이자 민주주의 로맨스인 <웨스트 윙>(West Wing)이나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범죄 수사물인 시리즈들, 드라마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의 동조화를 시도한 기발한 착상의 24시간 드라마 <24>와 같은 외국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둘 간의 커다란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의 작가나 감독들이 특별히 무능해서일까? 당연히 아니다.
우선 규모의 차이에서 오는 자본 동원력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공급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에게는 할리우드와 연결된 풍부한 인력과 돈줄이 있다.
수요 측면에서도 잠재 시청자가 1억명일 때와 1천만명일 때의 차이는 분명하다.
다만 최근의 한류가 둘 간의 규모 차이를 상당히 좁히고 있는 것은 분명할 듯싶다.
한류 이후 여러모로 대형화되는 우리 드라마 제작 추세는 배우 개런티의 증가든 규모와 범위의 증가이든 간에 시청자들조차 피부로 느낄 만큼 뚜렷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규모에 따른 차이를 접고 보면 핵심은 제작 시스템에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와 감독 모두 시간을 두고 머리를 맞대 충분히 자료를 조사하고, 여유 있게 촬영하고 그 내용을 꼼꼼히 편집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지난해 모 드라마의 마지막 회 편집이 앞 내용이 방송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 바 있는데, 이런 환경에서 드라마의 치밀함을 기대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하지만, 미리 시간을 두고 시리즈의 전편을 완성하는 사전전작제는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방송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왜일까? 여러 가지 제도적이고 역사·특수적인 상황을 제외한다면, 전작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위험 부담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드라마 제작의 위험성은 드라마 인기 여부에 따라서 광고 수입이 수시로 달라진다는 데 있을 터다.
광고주에게 일정한 액수 이상을 미리 넣으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면, 드라마의 성패에 따른 수익의 위험 부담은 대개 방송사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게 된다.
대박을 친 드라마에선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되, 쪽박을 차게 되면 제작비 부담은 물론 방송사의 평판이 떨어지는 추가적인 손해마저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전작제는 이러한 방송사의 위험 부담을 더욱 크게 만든다.
즉 일단 완성된 상태라면 어쨌든 끝까지 방송을 내보낼 수밖에 없다.
인기 없는 드라마의 방송 횟수를 대충 뚝 잘라낼 수도, 빗발치는 시청자들의 목소리에 맞춰 죽어가던 사람을 살려내고 헤어질 커플을 다시 만나게 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나쁜 경우에 대비해 쓸 수 있는 손이 전작제에서는 단단히 묶이는 셈이다.
그렇다면 시청자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어설프고 허술한 드라마들을 봐야하는 것일까? 전작제 시행 유무의 문제는 여러모로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와 닮아 있다.
모두가 함께 시행하면 질적으로 더 우수한 드라마가 생산되고,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더 안정적인 수익성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지금 앞장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는 자가 먼저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게 문제인 셈이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이렇듯 대단한 한류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실력이 전작제라는 좋은 환경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상상해 보자. 드라마의 소재도 훨씬 전문화될 것이고 범위도 넓어질 것이다.
이리저리 깁고 때운 흔적이 남아 있는 누더기 같은 플롯도, 배우들 연기의 허술함도, 인물 간의 억지스럽고 무리한 관계 설정도 훨씬 덜해질 것이다.
드라마를 보기나 하는 시청자의 한 사람일지언정, 이런 생각만으로도 꽤나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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