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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끝나지 않은 항해, 발렌베리의 150년 역사
[커버]끝나지 않은 항해, 발렌베리의 150년 역사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6.0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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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베리는 150년 동안 스웨덴의 산업과 금융을 지배해온 유럽 최고의 재벌 가문이다.
쉽게 말해 규모와 전통에서 한발 앞서는 ‘스웨덴의 삼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발렌베리의 역사는 후발산업국 스웨덴의 발전과정과 일치한다.
스웨덴은 북극권에 속하는 척박한 토양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전 국토의 10%에 불과한 빈국이었다.
배고픔에 지친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신대륙으로 가는 이민선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1865년에서 1930년까지 무려 140만명의 스웨덴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산업화가 절실했지만 맨주먹으로 산업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은 데다 스웨덴 특유의 상황들이 한계점으로 작용했다.
먼저 스웨덴은 인구가 적은 ‘소국’(小國)이다.
이는 협소한 내수시장과 초기 자본축적의 한계라는 문제점을 낳았다.
더욱이 19세기에는 ‘저축’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여서 산업투자에 필요한 자금 마련이 난제였는데, 발렌베리의 신화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857년 발렌베리는 스웨덴 최초의 민간 상업은행을 탄생시켜 국내외의 자금을 끌어모음으로써 19세기말 스웨덴 산업화의 기적을 뒷받침했다.
은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발렌베리는 이를 기반으로 유망한 기업들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점차 강력한 산업왕국으로 변모해갔다.
대은행가가 된 퇴역 해군장교 스웨덴 남부 린쾨핑 주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해군장교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1835년 미국 보스턴으로 향하는 넵툰호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방황하던 그가 탈출구를 찾기 위해 바다로 나선 것이었다.
이때 미국으로 건너간 앙드레는 은행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엄청난 은행 위기에 처해 있었다.
횡령과 사기성 주식공모, 파산이 줄을 이었고 급기야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주는 은행업 자체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탄탄한 은행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달은 앙드레는 2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스웨덴으로 돌아와 은행에 대한 책을 구해 탐독하기 시작했다.
1856년 드디어 발렌베리 왕국의 모태가 된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엔스킬다은행)이 문을 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20년 이상 준비해온 노력의 결실이었다.
스웨덴에는 이미 적지 않은 수의 은행이 있지만 이들은 지주들의 제한적 수요나 겨우 충족시킬 수 있는 보수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어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를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앙드레는 ‘근대적 은행’을 표방하며 자금시장 거래와 채권 발행, 해외차입 등 오늘날의 은행이 취급하는 각종 업무들을 스웨덴 최초로 도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앙드레는 산업부문에 대한 대출을 강화했는데, 발렌베리 가문의 트레이드마크인 ‘산업에 대한 장기투자’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북유럽의 메디치’로 불릴 만큼 은행사업으로 큰 돈을 번 앙드레는 ‘스웨덴 제2의 군주’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영향력이 커졌다.
하지만 그의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870년대 스웬덴은 유례 없는 경제호황을 누렸다.
영국과 유럽대륙의 경제 붐으로 수출품의 가격이 치솟으면서 이것이 국내 산업과 철도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자극했고, 예금도 가파르게 증가했다.
풍부한 자금을 확보한 엔스킬다은행은 철도 채권과 철강공장, 목재회사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 결과 채권이 전체 은행자산의 40%에 육박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경기과열과 은행위기의 신호였다.
1878년 드디어 고통스런 경기하강이 찾아왔다.
수많은 대출기업이 파산위기로 내몰렸으며 자금도 순식간에 말라갔다.
스톡홀름 최대 철강회사가 지급불능을 선언하자 혼란에 빠진 고객들이 예금을 찾기 위해 창구로 몰리는 공황상태가 발생했다.
정부의 긴급융자를 받고 나서야 가까스로 파산 위기를 모면했다.
거대 산업왕국의 탄생 앙드레가 죽자 33살의 장남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가 은행을 이어받았다.
크누트는 해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세계적인 은행 크레딧리요네에서 전문적인 금융교육을 받았으며, 21살 때부터 엔스킬다은행의 이사로 선임돼 은행 경영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등 은행가로서의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크누트는 우선 금융위기로 허약해진 은행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오랜 외국생활을 통해 국제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과 파리의 금융계 인물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엔스킬다은행은 이러한 크누트의 탄탄한 국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외자금 중개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크누트는 1900년대 초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금융시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북유럽 채권과 지방채 발행을 성공시켰으며, 이렇게 공급된 자금은 스웨덴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는 핵심 원동력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엔스킬다은행에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1911년 스웨덴 은행산업의 일반기업 주식 직접소유와 경영참여가 법적으로 허용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금융자본의 산업지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이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고, 주요 상장기업의 지배주주로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무차별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1910~1920년대에 주식시장에 엄청난 투기 붐이 일었는데, 엔스킬다은행은 추가적인 투자를 억제하고 기존 기업의 구조조정에 주력하는 보수적인 정책으로 재빨리 전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들의 운명은 순식간에 엇갈리기 시작했다.
1920년 초반, 기업 부실을 견디지 못한 은행들이 잇따라 파산한 것이다.
하지만 엔스킬다은행만은 예외였다.
오히려 북유럽에서 가장 유동성이 풍부한 최고의 은행으로 급부상했는데, 이는 1878~1879년의 금융위기를 통해 얻은 쓰라린 교훈을 간과하지 않은 발렌베리 가문의 값진 승리였다.
1878~1879년의 금융위기는 발렌베리가 단순한 신흥 금융가문에서 벗어나 거대한 산업왕국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은행의 최고경영자가 된 크누트는 대출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하는 부실기업들의 처리문제로 고민하던 중 법률교육을 마치고 판사 임용을 앞두고 있던 이복동생 마쿠스 발렌베리 시니어에게 도움을 청했다.
복잡한 법률문제가 얽혀 있는 부실기업 처리에는 마쿠스 같은 법률 전문가가 제격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마쿠스는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우선 부실기업 중에서 성장 잠재력이 있는 업체들을 발굴하여 회생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철강회사 SKF, 발전설비회사 아세아, 트럭제조회사 스카니아 등이 잇따라 발렌베리 왕국에 편입되었으며 발렌베리의 경제적 영향력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찾아온 평화 속에서 발렌베리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엔스킬다은행은 북유럽 인근 국가에 대출을 시작할 만큼 유동성이 넘쳐났으며,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수한 기업들의 경영도 본 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이와 함께 발렌베리를 겨냥한 날카로운 비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발렌베리에 대한 비판은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았다.
발렌베리는 정치 팜플렛에서 ‘마호가니 문 뒤에 숨서 스웨덴 전체를 주무르는 문어’로 묘사되곤 했다.
1934년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를 규정한 스웨덴판 ‘글래스-스티걸법’이 만들어지면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은행 소유주식을 지주회사를 설립해 넘겨줄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발렌베리의 소유지배구조도 변화를 겪게 된다.
후계자의 자살과 은행 합병 1960년대 말 거대한 좌파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쓰는 가운데 스웨덴의 사회 분위기는 또 한 번 들끓었다.
이런 와중에 발렌베리는 다시 한 번 거센 사회적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발렌베리의 가족소유 체제가 ‘시대착오적 산물’이자 ‘혐오스런 기성권력의 상징’으로 내몰린 것이다.
때마침 발렌베리가 군 고위층에 뇌물을 제공했다는 스캔들이 터져나오자 분노한 좌파 시위대들은 엔스킬다은행을 향해 “더러운 악취가 난다”고 외쳐댔다.
이런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가문의 후계자가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71년 11월 스톡홀름 남쪽 숲에서 엔스킬다은행의 사장 마르크 발렌베리가 권총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마르크는 발렌베리의 3세대인 마쿠스 발렌베리 주니어의 장남으로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후 뉴욕과 런던, 파리, 제네바의 국제적인 금융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3세대의 가장(家長)인 야콥 발렌베리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발렌베리 왕국을 이끌어갈 다음 세대 주자는 마르크의 몫이었다.
마르크의 자살은 가문의 모태(母胎)인 엔스킬다은행의 역사적 합병을 앞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마르크는 합병은행의 차기 사장으로 내정돼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는 죽었고, 그를 대신해 사장직을 물려받을 발렌베리 쪽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웨덴과 세계 언론은 발렌베리 가문의 시대가 끝났다는 전망을 쏟아냈다.
발렌베리는 1995년에야 겨우 선조들의 피와 땀이 응축된 엔스킬다은행(현 SEB)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형 마르크의 죽음으로 왕국을 넘겨받게 된 피터 발렌베리는 우선 그룹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완전히 새로 짜야 했다.
소유기업들에 대한 발렌베리의 지위가 급격하게 흔들려 지분을 대폭 끌어올리지 않고는 경영권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20세기 스웨덴의 가장 위대한 기업가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의 아버지 마쿠스 주니어는 적은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충분히 장악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피터는 주요 기업들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케마 노벨, 스칸디아, 알파-라발, 사브의 자동차 부문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자금은 여전히 부족했으며, 몇몇 기업은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새로운 시대의 리더 현재 발렌베리를 이끌고 있는 것은 동갑내기 사촌지간인 야콥과 마쿠스다.
이들은 발렌베리의 앞선 세대들처럼 장기투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그들만큼 인내심이 강하지 못했다.
발렌베리의 지주회사 인베스터의 실적이 악화될 때마다 주주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발렌베리는 그만큼 더 큰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야콥과 마쿠스는 발렌베리가 주주가치를 외면한 채 ‘가문의 영광’만을 추구한다는 비난 속에서도 ‘장기적인’ 주주가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발렌베리의 지난 150년의 경험이 그러한 원칙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소유기업을 장기적으로 책임지는 태도는 발렌베리가 스웨덴에서 얻고 있는 신뢰의 원천이기도 했다.
2000년대초 IT버블 붕괴로 에릭슨이 파산위기로 내몰리면서 발렌베리의 투자 포트폴리오가 집중돼 있는 지주회사 인베스터의 자산이 순식간에 반토막나기도 했다.
하지만 야콥이 인베스터의 회장에 취임해 발렌베리의 5세 경영이 본격화된 이후 인베스터의 실적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마쿠스는 2005년 9월 인베스터의 사장직으로 마감하고, SEB의 회장을 맡아 금융 분야에 전념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발렌베리의 경영자들은 “마이크로소프트와 넷스케이프가 100년을 이어가기는 어렵지만 발렌베리는 문제 없다”고 공언했다.
물론 그 사이 넷스케이프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과연 발렌베리가 그때의 공언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이제 새로운 항해에 나선 야콥과 마쿠스의 활약에 달려 있다.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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