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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간신열전]개혁가와 간신의 갈림길에 선 인물 - 신돈
[한국사 간신열전]개혁가와 간신의 갈림길에 선 인물 - 신돈
  • 최용범/ 역사작가
  • 승인 2006.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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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은 조선 왕조가 기록한 <고려사>에서 꼽힌 최악의 간신이다.
비록 <고려사 열전> ‘반역’편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전형적인 간신의 그것이다.
<고려사>에서뿐만 아니라 신돈은 조선 왕조 내내 경계해야 할 악의 상징으로 꼽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종, 명종 때까지도 신돈이 요승이란 기록을 남겼을 정도다.
“공민왕 때에 요승 신돈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다가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중종실록>) “요승 신돈이 임금의 권세를 빙자하여 제멋대로 방자한 짓을 하는데도 상하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어떻게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중종실록) “요망한 중으로 국가를 어지럽힌 자가 많았으니, 묘청과 신돈의 화가 뒷사람들의 거울이 되고도 남는다.
"(<명종실록>) 이런 정사의 기록만이 아니라 민간에 떠도는 민담에서도 신돈은 요승으로 전해진다.
아들을 못 낳는 여자들이 불공을 드리러 오자 이를 범하여 수백 명의 아들을 두게 되었다는 내용 따위다.
조선시대 내내 민과 관을 망라해 요승이자 간신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신돈은 공민왕의 개혁을 앞장서서 수행했던 개혁적 정치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절의 종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천출이었지만 신돈은 공민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가며 고려의 2인자로서 강력한 개혁정책을 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사지가 찢겨져 팔도에 떠돌아다니게 될 정도로 비참했다.
극과 극을 오간 삶.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신돈은 누구인가. 먼저 그가 공민왕에게 선발된 배경부터 보자.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구원투수로 등판 1365년 왕위에 오른 지 15년이 된 공민왕은 완전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2년 전에는 그의 반원자주화 움직임에 불만을 품은 원나라가 충선군의 서자인 덕흥군을 왕위에 세우고 공민왕을 퇴위시켰다.
그 이듬해 다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왕으로서의 체면은 깎일 대로 깎인 뒤였다.
복위된 해에는 그를 시해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공민왕의 측근 세력인 정세운, 안우, 김득배 등이 김용의 모략에 의해 서로를 죽이고, 처형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그 전 해에는 금슬 좋고, 정치적 후원자 역할까지 다하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사망했다.
그의 곁에는 원대한 정치개혁을 수행해갈 측근이 아무도 없게 된 것이었다.
대신 공민왕의 주변에는 홍건적의 침입을 무찔러 명망을 얻은 최영 같은 무장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세신대족이라 불리는 권세가문들은 서로간에 뿌리 깊이 이어져 있어 왕실보다 더한 힘을 갖고 있었다.
초야신진이라 부르는 신진관료 세력은 처음에는 깨끗한 척 하다가도 이름을 얻게 되면 명문가와 혼사를 맺지 못해 안달이었다.
유생이라고 불리는 선비들은 유약하기 짝이 없었고, 그들끼리 문생·좌주·동년이라 칭하며 패거리 짓기에 열중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은 그의 개혁 파트너가 될 만한 인물에 목말랐다.
세상의 욕심에 초연하여 오로지 개혁 하나에만 열중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중용하겠다는 것이 공민왕의 생각이었다.
바로 이때 나타난 인물이 신돈이었다.
신돈은 영산 사람으로 그의 모친은 계성현 옥천사의 여종이었다.
당시 모친이 종이면 출가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 신돈이 어린 시절 중이 됐다는 것을 볼 때 아버지는 상당한 지위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천출이란 이유로 중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해 항상 산방(山房)에서 거처했다고 한다.
공민왕 8년 김원명의 추천으로 신돈은 왕과 면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불도에 전념하면서도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고관인 김원명에게도 그 소문이 들렸을 것이다.
이때 공민왕은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하고 고담준론을 펴는 신돈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총명하고 지혜로운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 뒤 공민왕은 신돈을 비밀리에 불러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천출 신분에서 왕의 사부로 신돈이 본격적으로 중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365년경이었다.
왕이 신돈에게 청한거사(淸閑居士)란 호를 주고 사부(師傅)라고 불러 국정에 대해 자문을 의뢰했던 것이다.
왕의 특보로 기용된 셈이었다.
신돈이 국정에 참여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정계 개편이었다.
이공수, 경천흥 등 세신대족이라 불리는 기득권 세력을 정계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신진세력을 공민왕의 측근세력으로 중용했다.
이때 최영 역시 경주로 좌천당해 내려갔다.
그리고 공민왕이 기용하기를 꺼려 했던 관료들 중 상당수를 유배 보내거나 파면해 정계에서 축출했다.
그 대신 신돈은 개혁에 동참할 세력으로 신진사대부로 불리게 될 초야신진을 꼽았다.
이들은 대부분 이제현 등 명망 있는 학자의 계보에 속해 있어 친위세력이 되기에는 위험 요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신돈은 이제현과 이들의 고리를 끊어내 개혁에 동참하게 하였다.
신돈이 개혁정치를 펼 때 등장했던 인사들은 이색,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으로 이들은 고려 말에서 조선 개국에 이르는 전환기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개혁을 위한 인사조치를 마치고 난 이듬해인 1366년 신돈은 드디어 고려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공민왕 15년(1366) 5월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의 설치를 공민왕에게 청하였고, 공민왕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인 판사가 되어 토지개혁사업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전민변정(田民辨正)이란 토지의 소유자를 밝히고 신분을 바로잡는 것을 말했다.
당시 권세가들은 평민들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거나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는 일이 많았다.
또 백성들도 강제로 노비로 만들어 부려먹었다.
권세가의 횡포로 인해 국가는 세금을 걷지 못해 재정이 고갈될 지경이었다.
억울하게 노비가 되는 백성뿐만 아니라 지방관의 횡포를 피해 유랑 걸식하는 평민의 수도 많아졌다.
사실 이런 문제는 무인정권 이래 계속돼온 것이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힘이 너무 강해 손을 제대로 댈 수 없었다.
그러나 신돈의 명령은 엄격했다.
서울은 법령 발포 후 15일, 지방은 40일 이내에 자진 신고할 것을 명했다.
자진 신고하지 않을 경우 처벌은 엄했다.
그러자 권세가들이 강점했던 땅과 노비들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소수의 권세가를 제외하고 나라 전체가 이를 기뻐했다.
백성들은 ‘성인(聖人)이 나왔다’며 환호했다.
그리고 이 해에는 풍작까지 들어 공민왕이 “금년의 풍작은 실로 첨의(신돈)가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 것에 연유한 것”이라며 흡족해했다.
토지개혁 단행해 백성들의 신망 얻어 신돈은 1367년 공민왕의 명령을 받아 성균관을 건축하기도 했다.
이 해는 고려 말 신진사대부세력의 대부격인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던 해였는데 신돈은 류탁, 이색과 함께 성균관 옛터에서 중건을 다짐했다.
흥미로운 점은 주위 인사들이, “옛 규모만 조금 못하게 하면 일이 쉽게 될 것”이라며 소극적으로 임했던 반해 신돈은 오히려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공자는 천하 만세의 스승인데 어찌 사소한 비용을 절약하느라고 전대의 규모보다 줄일 수 있느냐!”승려인 신돈이 유교의 비조인 공자를 숭상했던 것이다.
신돈은 이제현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기득권 세력을 제어했다.
하지만 당대의 개혁적 정치사상이었던 성리학적 이념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개혁색이 짙은 젊은 성리학자들이 성균관을 근거삼아 개혁적 정치이념을 개발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과 신돈의 파트너십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신돈의 개혁에 반발하는 기득권 세력의 공세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밑바닥에서부터 부정하는 신돈을 제거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었던 그들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중앙에 정치적 기반이 없던 신돈은 이런 저항을 막을 힘이 없었다.
신돈의 지지기반이라고는 하위직 관리와 조직화되지 못한 백성뿐이었다.
신돈은 자신을 ‘성인’으로 추앙하는 백성들을 조직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예컨대 판사 장해란 자가 자신의 옛 종이었지만 지금은 낭장 벼슬을 하는 사람을 버릇이 없다 하여 채찍으로 때린 일이 있었다.
옛 종이 신돈에게 호소하자 그는 장해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기득권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백성의 지지기반을 쌓아올리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고려 초의 강력한 개혁군주였던 광종이 호족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백성과 하위직 관리를 후원하던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광종은 공민왕과 마찬가지로 국내에 세력기반이 없는 중국 출신의 쌍기를 등용해 강력한 개혁정치를 편 바도 있었다.
권력 단맛에 취해 반대세력 공격 빌미 제공 그러나 쌍기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이유도 지지기반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신돈 역시 힘이 부쳤다.
기득권 세력들은 신돈이 간통을 했다느니, 왕 앞에서 무례한 행위를 했다느니 하며 신돈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그의 집이 일곱 채이며 뇌물을 받았다는 등 부정축재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승려인 신돈이 여자를 가까이 하고 애가 있다는 공격까지 했다.
두 차례에 걸쳐 신돈을 암살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다.
불행히도 이런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건 신돈 자신이었다.
치솟는 권력의 단맛에 현기증을 느끼며 자기관리에 실패했던 것이다.
초지일관되게 악의적으로 신돈의 악행을 부각시켰던 <고려사>의 기록만큼은 아니겠지만 신돈이 돈과 여자, 그리고 아첨하는 소인배의 유혹에서 자유로웠던 것 같지는 않다.
공민왕은 신돈을 스승으로 예우했다.
궁궐 옆에 집도 지어주고 함께 있을 때면 ‘밑’이 아닌 ‘옆자리’에 앉히려 했다.
벼슬 역시 영도첨의사사로서 최고위직이었다.
조정 백관이 신돈에게 절을 하고, 원나라와 명나라에서도 그의 실력을 알아 벼슬을 내리는가 하면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서 오르면 돈과 여자, 그리고 아첨공세가 똥구더기처럼 몰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돈은 그걸 관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뜩이나 반격의 칼을 품고 있던 기득권 세력에게 호재가 될 만한 추문들을 스스로 제공했던 것이다.
이를 빌미로 한 기득권 세력의 공세를 공민왕은 견딜 수 없었다.
아니 공민왕 역시 신돈을 의심했다.
“왕의 천성은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비록 심복 대신이라도 그의 권세가 성해지면 꺼리어 죽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반역과 외세의 위협 속에서 개혁정치를 펴자면 자연 의심 많고 잔혹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격변기의 개혁을 이루려는 권력자라면 필연적으로 마키아벨리적인 속성을 띠기 마련이다.
개혁군주 공민왕의 숙명이 그것이었다.
때마침 선부의랑 이인이란 자가 한림거사(寒林居士)란 가명으로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는 내용의 투서를 재상 김속명의 집에 보냈다.
김속명은 이를 공민왕에게 보였다.
왕은 신돈과 그 일파를 잡아들일 것을 명했다.
결국 신돈과 35명에 이르는 인물들이 반란죄 명목으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기용하면서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란 맹세를 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튈지 모를 불똥 앞에서 공민왕은 신돈을 보호할 수 없었다.
정치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신돈의 최후였던 것이다.
신돈 개혁의 실패는 기득권 세력에게 포위된 개혁세력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권력은 쥐었지만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면 개혁의 성취도 어렵거니와 정치적·생물학적 생명마저 보장받지 못한다.
신돈 역시 자신의 개혁정치를 이인임 같은 권문세가에게 맡기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다 도덕성까지 상실했으니 그 말로가 비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패자(敗子)에 대한 역사의 폄훼와 분칠이 과도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최용범/ 역사작가 gaji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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