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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황당한 까루푸’에 멍드는 유통업계
[진단]‘황당한 까루푸’에 멍드는 유통업계
  • 조성곤 기자 한겨레신문경제부
  • 승인 2006.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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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등 파행 진행에 ‘눈치 보기만’ 프랑스계 대형할인점 까르푸의 인수전이 치열하던 지난 13일 할인점업계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까르푸 쪽이, 인수제안서를 제출한 롯데마트와 이마트, 홈플러스, 이랜드 등 4개사를 모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한 탓이다.
통상적인 관행대로 ‘우선협상대상자 1곳과 예비후보자 1곳 등 2곳’으로 좁혀질 것을 기대했던 업계는 어이가 없었다.
인수제안서 제출 뒤 9일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는 뜻이고, 인수전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 것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사실을 롯데마트에 먼저 알린 뒤 순차적으로 다른 후보들에게 알리는 희한한 통보 방식이다.
당일 ‘복수의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됐다고 통보받은 롯데마트는 즉각 이를 공시했다.
언론들은 또 다른 ‘복수의 후보’가 누구인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마트와 이랜드는 “통보받지 못했다”고 확인했고, 홈플러스는 “본사에 확인 중”이라고 답변했다.
당연히 언론은 “까르푸 인수전, 롯데-홈플러스로 압축”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까르푸 쪽은 언론 보도 뒤인 그날 밤 늦게 홍보대행사를 통해 “다른 후보들에게도 순차적으로 선정 사실을 통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롯데마트는 헛물을 켜고, 언론은 ‘오보’를 날린 셈이다.
매각과정 곳곳서 오만방자한 행태 업계에서는 이처럼 원칙도 관행도 없는 까르푸의 행태를 두고 ‘몸값’을 올리려는 꼼수로 보고 있다.
인수제안서에 가장 높게 값을 써낸 것으로 알려진 롯데에는 “아직 게임이 끝난 게 아니야”라는 신호를, 다른 업체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어”라는 언질을 준 것이라는 풀이다.
그러나 다른 3개 업체에서 추가적인 가격인상 의사를 보이지 않자, 부랴부랴 4개사를 모두 선정한다는 ‘편법’을 썼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오만방자한 까르푸의 행태는 매각과정 곳곳에서 발견된다.
필립 브로야니고 한국까르푸 사장의 경우 최근 홍보대행사를 통해 조만간 기자회견에서 매각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했다가 “분위기가 안 좋다”는 이유로 회견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가 하면, 올 초 까르푸 매각설이 보도되자 ‘공정위 고발’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매각설을 부인하기도 했다.
까르푸는 지난 4일 후보업체들의 인수제안서를 마감하고 나서야 본사 차원에서 한국까르푸의 매각을 공식 확인했다.
업계에서도 이런 까르푸의 안하무인격 행보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더 이상 끌려다니지 말자’는 공감대마저 형성되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는 매각가격이 애초 1조원 안팎에서 2조원에 육박할 정도로 높아지고 있는데 대해, “국부유출이 우려된다”는 국내 여론의 질책도 한몫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켠에서는 “더 이상 끌려다니지 말고 후보업체들끼리 더 이상 값을 올리지 말도록 의견을 모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할인점업계의 구도를 보면, 매각 협상이 업계의 분위기대로 고쳐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누구라도 먼저 “더 이상 협상은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뭔가 달라지겠지만, 서로 눈치만 볼 뿐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다.
까르푸의 인수 향방에 따라서는 업계 전반의 대대적인 지각 변동이 예상되는 만큼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탓이다.
서로 눈치만 보는 유통사들 현재 할인점업계는 점포 79개를 거느린 이마트가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고, 이어 홈플러스와 롯데마트가 각각 점포 42개와 43개로 각각 2위와 3위를 형성하고 있다.
홈플러스의 점포 수가 하나 적지만, 점포당 실적이 좋아 매출에서 롯데마트를 앞서고 있다.
이들 3대 할인점이 점포 32개로 4위인 까르푸를 인수하는 데 따른 영향을 업체별로 따져보면, 먼저 이마트는 100개가 넘는 점포를 거느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사실상 국내 할인점업계를 평정하는 셈이다.
이는 곧바로 2위권인 홈플러스와 롯데마트에는 위협이 되는 상황이다.
다만 이마트의 인수 의지는 2위권보다는 약하다는 게 중론이고, 인수제안 가격도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낮은 가격으로 인수한다면 다행이고, 아니더라도 입찰에 참여함으로써 값을 올려 결과적으로 경쟁업체들의 재정적 부담을 크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이마트 관계자는 “솔직히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는 아직 할인점이 없는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해, 현재의 시장 판도에 변화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홈플러스와 롯데마트의 경우 까르푸를 인수하면 각각 점포 74개, 75개씩을 확보하며 막강한 2위에 올라 3위와의 간극을 넓히는 한편 1위인 이마트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가게 된다.
둘 가운데는 롯데 쪽의 사정이 더 급하다.
할인점 부문과 달리 ‘반석’에 오른 백화점 부문을 더해 국내 유통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롯데지만, 이마트의 급성장세를 막지 못할 경우 유통 1위 자리를 신세계에 넘겨줄 처지에 놓이게 된다.
특히 신세계의 경우 까르푸 인수와는 별도로 이마트 점포 수를 2009년까지 130개로 확장할 계획인데 견줘, 롯데는 2008년까지 늘려도 고작 80개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다.
롯데로서는 올해 초 상장을 통해 마련한 3조6천억원대의 ‘실탄’으로 더 많은 점포를 내고 싶지만, 이마트 등 선발업체들에 유망지역을 선점당해 그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말 현재 롯데와 신세계의 매출액은 각각 8조8400억원과 8조6240억원으로, 롯데가 근소한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까르푸의 한국시장 철수는 오래전부터 예견돼왔다.
지난 1996년 인천 중동점을 시작으로 한국시장에 발을 디딘 까르푸는 그동안 노동조합과의 갈등이나 공정당국과의 잦은 마찰 등으로 “현지화에 실패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아왔다.
또 점포당 매출액이 평균 500억원 정도로, 이마트 등 경쟁업체의 절반에 불과한 현실에서 더 이상 매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전세계 30여개국에 1만3천여 개의 매장에서 연간 10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월마트에 이어 세계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까르푸가 한국시장에서는 현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 셈이다.
인수 향방 따라 업계판도 변화 까르푸는 그동안 매장 운영과 직원 고용 두 측면에서 모두 마찰을 빚어왔다.
매장 운영에서는 전 세계 매장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경영방식을 고수한 게 화근이 됐다.
매장 내 위치에 따라 협력업체의 수수료를 더 물리고, 광고전단에서도 위치에 따라 협력업체에 수수료를 추가했다.
까르푸로서는 ‘과학적인 수수료 체계’였지만, 협력업체로서는 다른 할인점에 견줘 지나친 수수료 체계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런 마찰은 공정거래위원회에 제보돼, 숱한 제재로 이어졌다.
지난 10년간 까르푸에 대한 공정위의 시정조처 건수는 다른 업체의 2배를 넘어설 정도다.
직원 고용 면에서도 ‘비정규직 3년이면 정규직화’하는 프로그램이 운용돼오다가 5년여 전부터 사문화되면서 노조와의 갈등이 심화됐다.
일부 점장들이 이를 약속했다가 경영진의 반대로 무산된 적도 있다는 게 노조 측의 설명이다.
부실한 매출 실적은 철수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업계에서는 32개 까르푸 매장 가운데 수익을 내는 곳이 월드컵몰과 야탑점, 면목점, 목동점, 중계점 등 대여섯 곳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산·경남지방과 충청, 경기 수원 등의 상당수 매장은 사실상 적자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앞서 언급한 수익 매장들도 고가의 임대료 또는 경쟁업체의 입점 등 상황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이 때문에 업계 일부에서는 인수후보자들이 까르푸 매각 시점을 한참 뒤로 늦춰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한 4~5년 정도 기다리면 매각가격이 한참 낮아질 수도 있을 것”이라며 “실제 까르푸는 일본 매장을 매각하면서 뜸을 들이다 사정이 나빠져 헐값에 팔고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증권가에서도 자칫 인수후보자끼리의 경쟁으로 인수가격이 너무 오를 경우 리모델링 등 추가 비용 때문에 인수업체가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 조성곤 기자 한겨레신문 경제부 c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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