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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디자이너의 아이디어로 제품 개발하라 ③
[커버스토리]디자이너의 아이디어로 제품 개발하라 ③
  • 김영한 마케팅MBA 대표
  • 승인 2006.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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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소요기간 단축 효과 … 제품 원가 내려가고 고객 니즈도 맞출 수 있어 미국에서는 모토로라의 ‘레이저 폰’을 애플의 MP3 플레이어 히트작 ‘아이팟’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첨단 기술을 포기한 대신 디자인을 강조한 제품 콘셉트나 히트 상품 하나가 빈사상태였던 회사를 극적으로 되살렸다는 점에서 둘 다 비슷하다.
또 두 제품은 승승장구하던 한국의 휴대폰과 MP3 플레이어 산업에 치명타를 날렸다.
모토로라는 과감한 아웃소싱(외주 생산)과 대량 생산을 통해 값싼 휴대폰을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로 인해 ‘품질’ 평가에서는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런 모토로라가 ‘통념’을 깨고 개당 500달러(47만원 정도)가 넘는 고가 시장에 도전한 것이다.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얇다’는 디자인과 ‘Hello, Moto(안녕, 모토로라)’라는 심플한 광고 문안 등 감성 마케팅이 맞아떨어져 히트 상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적자에 허덕이던 모토로라가 어떻게 이처럼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6시그마에 의한 옛날 제품의 품질 개선이 아니라 디자인 경영에 의한 새로운 제품 창조에 있다.
원천기술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자 모토로라(Motorola)의 역사는 무선통신의 역사다.
1969년 달에 처음 착륙한 닐 암스트롱이 “인간의 작은 발걸음 하나, 그러나 인류가 성취한 거대한 발걸음”이라고 외친 것도 바로 모토로라의 우주통신용 무전기를 통해서였다.
모토로라는 1928년 폴 갤빈(Paul Galvin)이 565달러의 자본금과 5명의 사원과 함께 시카고에서 설립됐다.
그는 2차 대전 때 군사통신 장비인 휴대용 무선기 워키토키(Walkie-Talkie)를 개발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1964년에는 차량용 휴대폰을 개발했고 1988년에는 휴대용 전화기를 개발, 무선통신업계의 리더로 군림했다.
그러나 아날로그식의 무선통신 왕좌에 오래 군림하다보니 새로운 디자인이나 디지털화에 뒤지게 되었다.
새로운 디자인의 노키아에게 시장을 점차 내주었고 디지털화의 대응이 늦어지자 리더를 노키아에게 내주면서 2001년에는 39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회장인 크리스퍼 갤번은 잭 웰치가 한 것처럼 15만명의 인력 중 6만 명을 구조조정했다.
그는 반도체 사업부문을 분사시키고 2002년에 사임했다.
2004년 1월, 모토로라는 후임 회장으로 선(SUN)마이크로시스템즈 출신의 에드워드 젠더 (Edward Zander)가 취임했다.
젠더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끊임없는 이동성을 제공한다’를 회사의 새로운 비전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고객 위주의 경영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모토로라는 디자인, 브랜드 가치 부분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R&D 투자에 적극 나섰다.
2004년에는 30억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는 매출의 15%에 해당된다.
3세대 디지털 기술을 탑재하고 디자인을 강조한 아이코닉 (Iconic) 제품으로 승부를 건 것이다.
모토로라는 전례 없이 혁신적인 디자인과 기능으로 무장한 제품들을 시장에 쏟아내면서 상황을 반전시켰다.
특히, 얇은 면도날을 연상시키는 ‘레이저 V3(Razr V3)'라는 이름의 초 슬림 휴대폰은 뉴욕 타임스가 ‘훌륭한 최신 휴대전화’로 선정했을 정도였다.
디자인 위해 기능 포기한 모토로라 그 동안 ‘포기와 체념’의 문화에 사로잡혔던 모토로라가 이렇게 제품 혁신에 성공하게 된 비결은 이렇다.
첫째, “감성에 호소하는 멋진 제품을 창조한다”는 명확한 지향점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CEO 애드 잰더는 취임 후 모토로라의 제품 비전을 ‘아이코닉 디바이스(Iconic device)'로 정했다.
이것은 소비자의 자기표현 욕구에 부응하는, 한 마디로 멋진 디자인의 매력적인 제품을 말하는데, 고객이 꿈꾸는 아이콘을 형상화한 제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 디자인팀을 소비자 가까이로 옮겼다.
창의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은 의지만으로는 부족하고,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했다.
‘레이저’의 개발 과정을 보면 모토로라의 디자인 철학이 변한 모습을 실감할 수 있는데, 우선 시장조사 과정을 생략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신제품 콘셉트에 대해 토의하는 소비자 그룹, 이른바 ‘포커스 그룹’의 의견 수렴을 통해서 제품의 개발 방향을 구체화시켰었다.
그러나 고객들은 때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잘 형상화 하지 못했다.
레이저를 개발할 때는 이러한 고객의 피드백 없이, 디자인팀의 아이디어만을 토대로 해서 개발을 추진했다.
덕분에 개발에 소요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고, 따라서 제품 원가를 낮추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대신, 소비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관찰함으로써 그들이 열망하는 세련된 제품 콘셉트를 발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디자인팀의 사무실을 시카고 교외에서 시내 중심가로 옮겼다.
셋째, 디자인을 위해 기능을 포기했다.
휴대폰 기획팀은 기존의 모토로라 제품이 기술적으로는 우수하지만 너무 크고 디자인이 투박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휴대폰의 콘셉트는 ‘휴대폰은 휴대하기 편한 전화’라는 기본에 충실했다.
휴대하기 편한 것이 먼저고 카메라, MP3, 게임 같은 기능은 그 다음이 됐다.
휴대폰에 얼마나 많은 기술을 넣을 것이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를 고민했다.
시장에 1천만 화소의 디지털 카메라 기능과 MP3에 200곡까지 담을 수 있는 휴대폰이 나와 있었지만 레이저에는 130만화소에 20곡 정도의 기능만 담았다.
대신 두께를 얇게 하고 키보드의 소재를 메탈로 바꾸었다.
넷째, 유행을 선도하는 젊은층에 어필할 마케팅을 전개했다.
모토로라 침체기의 광고는 당시의 제품만큼이나 소비자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각인시키지 못했다.
‘윙(Wings)'이라고 불리는 그 시절의 광고 캠페인은 모토로라 제품 주변으로 깃털이 떠다니고 아이스하키 퍽이 날아다니는 내용이었는데 “낯설고 잊기 쉬운, 참으로 성의 없는 내용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2002년 이후 추진되고 있는 ‘헬로 모토(Hello Moto)’ 캠페인은 젊은층을 대상으로 모토로라의 제품이 그들의 삶에서 패션과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킬 것이라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디자인 기업으로 변신한 삼성전자 2006년 7월 월례사에서 윤종룡 부회장은 “보르도TV의 성공 요인을 배워서 히트상품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보르도TV는 ‘디자인, 기술, 생산, 마케팅’의 4가지 측면에서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아이코닉 디자인 혁신의 성공 모델이다.
윤 부회장은 “소비자가 원하는 요구와 가치를 발견하여 제품에 반영해야만 고객과 회사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고 말했다.
이 보르도TV를 포도주 잔처럼 디자인 한 곳이 디자인경영센터다.
삼성전자는 10년 전에 1996년을 ‘디자인 경영 혁신의 해’로 선포하고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디자이너를 적극 양성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1996년 신년사에서 디자인 경영의 기본철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기업디자인은 상품의 겉모습을 꾸미고 치장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담아야 한다.
1천만대 판매 기록을 세운 벤츠 폰에 이어 블루블랙 폰 등이 쏟아져 나왔다.
휴대폰 디자인팀은 “사용자로부터 출발하여 내일을 담아내는 디자인”이라는 슬로건으로 사용자 중심의 아름다운 디자인을 개발했다.
디자이너가 단순히 제품의 케이스만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제품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시스템이었다.
2001년부터는 디자인본부를 디자인경영센터로 부르고 있다.
디자인이 제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경영의 일부분이라는 의미에서 디자인경영이라는 말을 썼다.
디자인경영센터의 윤지홍 전무는 말한다.
“경영자도 디자인을 알아야 하고, 디자이너도 경영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디자인하는 것인 만큼 디자이너도 비즈니스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디자인에 투자하는 데는 경영자의 관심이 절대적이죠. 소니는 사장실이 디자인센터 바로 옆에 있습니다.
” 초기에는 디자인팀이 연구소와 같이 수원공장에 있었다.
이것을 1994년에 서울로 옮겼다.
디자인 본부를 서울로 옮기려 하자 사업부가 반발했다.
“디자인팀이 떠나면 디자이너를 다시 뽑아서 배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윤 전무는 "디자인팀이 공장과 붙어있으면 디자이너가 생산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또 디자이너의 근무환경도 중요했다.
새로운 트렌드 정보와 소비자 정보가 디자인에 반영되어야 한다.
일본의 마쓰시다나 산요도 디자인 센터를 도쿄로 옮겼다.
삼성도 결국 디자인 본부를 서울의 중앙일보사 건물로 옮기고 글로벌 디자인 네트워크도 구축했다.
지금은 미국의 뉴욕, 일본의 도쿄, 중국의 상하이, 이탈리아의 밀라노, 영국의 런던에도 디자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2006년 7월 현재 디자인센터의 인원이 600명이고 그 중 120명이 외국인이다.
이 중 일부는 해외 5개 지점에서 근무하며 미국, 일본, 중국, 이탈리아, 영국의 최신 디자인 트렌드를 파악하여 공유하고 현지에 맞는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다.
디자인경영센터에는 디자인전략팀과 디자인연구소 2개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디자인전략팀에는 글로벌디자인그룹 등이 소속되어 있다.
글로벌디자인그룹은 전체적으로 디자인전략기획과 홍보 역할을 맡고 있다.
디자인연구소에는 각 사업총괄별로 디자인개발그룹과 CNB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윤지홍 전무는 “예전에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제품에 껍데기를 씌우는 것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배터리, LCD 등 부품은 물론 기술 로드맵에 대한 연구를 통해 디자이너가 제품 개발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미래에 출시할 휴대폰은 앞서 개발한 뒤 저장해 놓는 ‘디자인 뱅크제’도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팀이 미래의 정보통신 환경 및 일반인들의 사용 시나리오를 토대로 단기, 중기, 장기 등 단계적으로 휴대폰을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윤 전무는 “기술 중심의 기업인 삼성전자에 인간의 얼굴을 입히는 것이 디자인 경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디자이너가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엔지니어의 기술이 이성이라면 디자이너의 감각은 감성입니다.
” 삼성전자는 글로벌 디자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제휴했다.
애니콜의 디자인을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인 제스퍼 모리슨에게 맡기고 냉장고와 에어컨의 디자인을 앙드레김에게 의뢰해서 지금과는 다른 디자인의 가전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또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아이코닉 디자인 (Iconic Design)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한 중장기 로드맵도 만들었다.
2005년까지는 제품 리더십을 강화하여 삼성다움의 정체성을 확보했다면 2007년까지는 보다 참신한 디자인 제품을 만드는 독창성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또 2009년까지는 고객의 니즈를 충족하면서 보다 감성적인 제품을 만들어내는 아이코닉 디자인을 확립한다는 계획이다.
2006년 4월부터 선을 보인 보르도TV는 3개월 만에 북미시장에서 소니의 ‘브라비아"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로 도약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보르도TV는 와인 잔을 형상화 디자인으로 세련미와 우아함을 강조한 제품이다.
애플은 세계 최초로 퍼스널 컴퓨터를 개발하여 80년대 초반에 PC업계의 리더로 우뚝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협공으로 인해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그러나 2000년 들어서 아이팟 (iPod)이라는 새로운 디자인의 MP3를 들고 나오면서 애플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바로 디자인이 관건이었던 것이다.
김영한 마케팅MBA 대표 ceo@marketingmb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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