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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런트] 담합하다 여차하면 ‘슬라이딩’
[커런트] 담합하다 여차하면 ‘슬라이딩’
  • 이윤찬 기자
  • 승인 2007.04.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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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신고자 감면제도' 백태] 호남석유화학, 007 작전 방불케 하는 ‘1차 신고’로 과징금·검찰고발 면제 공정거래위원회 안팎에 최근 심심찮게 떠도는 말이 있다.
‘슬라이딩(sliding) 신고’가 그것이다.
이는 공정위의 ‘자진신고자 감면제도(leniency)’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해프닝’을 일컫는 신조어다.
‘자진신고자 감면제도’는 담합(카르텔)에 가담했어도 이를 공정위에 자진신고하거나 관련 자료를 제공하는 등 조사에 협조하면 과징금 부과와 검찰고발을 면제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선착순’과 다를 바 없는 제도다.
1차 자진신고자에겐 과징금 전액과 검찰고발 면제 등 가장 많은 혜택이 보장된다.
2차 자진신고자는 과징금 30%와 검찰고발을 면제받는다.
3차 자진신고자부턴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실제 공정위는 지난 2월 석유화학업체들이 11년간 담폴리프로필렌(PP)과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가격을 담합해 인상한 사실을 적발해 관련업체에 105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삼성토탈(구 삼성종합화학)을 간발의 차이(?)로 따돌리고 담합사실을 가장 먼저 신고한 호남석유화학은 과징금 전액과 검찰고발을 면제받는 혜택을 누렸다.
담합기업들이 최근 자진신고를 먼저 하느냐를 두고 ‘눈치보기’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야만 호남석유화학 처럼 과징금 징수와 검찰고발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자진신고자 감면제도를 통해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담합업체들은 특정 업체가 자진신고를 준비하고 있는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면서 “만약 공정위 입구에서 경쟁 업체를 만나면 ‘슬라이딩’을 해서라도 먼저 자진신고를 접수하는 풍경이 연출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조어 ‘슬라이딩 신고’는 결국 ‘자진신고자 감면제도’에서 비롯되고 있는 웃지못할 ‘백태’를 풍자한 말이다.
공정위 측은 “자진신고자 감면제도는 올바른 경쟁질서 확립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담합조사는 제보가 없으면 허탕을 치기 일쑤”라며 “때문에 자진신고는 담합의혹을 밝히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했다.
이어 “이같은 자진신고를 통해 담합사실을 스스로 밝히는 기업 문화가 정착되면 담합으로 인한 소비자들의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거세다.
무엇보다 자진신고를 먼저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각종 혜택을 보장해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가령 담합을 주도해 소비자에게 가장 큰 피해를 끼친 업체가 자진신고를 먼저 했다면 과연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게 합당하냐는 것이다.
허원준 석유화학공업협회장(한화석유화학 사장)은 “담합사실이 밝혀졌을 때 과징금을 가장 많이 내야 하는 기업은 담합을 주도한 곳”이라며 “그런데 자진신고를 먼저 하는 기업에게 과징금을 면제시켜주는 등 각종 혜택을 주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고 강력 비판했다.
문제는 또 있다.
담합업체들이 ‘자진신고자 감면제도’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반목’과 ‘불신’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담합의혹이 고발돼 1천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 받은 석유화학업계가 자진신고 이후 협회장 교체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단적인 사례다.
‘슬라이딩 신고’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공정위의 ‘자진신고자 감면제도’. 과연 설왕설래가 가득한 이 제도가 담합문화를 척결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이윤찬 기자 chan4877@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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