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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리포트] 노동운동 분열은 사회적 연대 붕괴 Ⅱ
[스페셜리포트] 노동운동 분열은 사회적 연대 붕괴 Ⅱ
  • 이정환 기자
  • 승인 2006.1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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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 2개월 스웨덴 현지르포] 화이트칼라 노조 이탈…“LO는 가장 거대하면서 가장 힘없는 조직” 사회적 합의는 서로의 힘이 비슷해야 가능하다.
스웨덴에서 1938년 12월의 찰츠요바덴 협약이 그랬다.
노동조합총연맹(LO)와 기업연합(SAF)이 체결한 이 협약의 핵심 내용은 노조가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대신 임금협상을 개별기업 단위가 아니라 LO의 중앙조직 차원으로 단일화하자는 것이었다.
LO는 이 협약 이후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됐고 LO를 지지기반으로 사회민주당은 74년 동안 장기집권을 이어올 수 있었다.
연대임금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광범위한 복지시스템은 이런 힘의 균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1994년 SAF가 노사합의를 거부하고 나가면서부터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LO는 왜 조용한 것일까 11월 15일 오후, 스톡홀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는 모처럼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횃불을 든 청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기마경찰들이 그 주변을 에워쌌다.
왕궁에서 겨우 500미터 떨어진 광장. 청년들이 외치는 구호에는 과격한 분노가 묻어났다.
“Ror inte a-kassan!(실업보험을 내버려둬라)” “Vi vagrar halla kaften!(입 닥치라고 말하지 마라)” 이날 집회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무정부노동조합주의) 조직인 SAC(스웨덴노동자중앙기구)가 주최했고 이들과 같은 노선을 추구하는 지하철 노조가 함께 참여했다.
두 시간 가까이 지하철이 멈춰 섰지만 불평하는 시민들은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날 집회에 LO 소속 노동자들이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복지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손질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집권에 성공한 새 정부가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들 위험한 정책을 입안하려고 하는 시점이다.
실업보험이 축소되면 수많은 실업자들이 거리로 나앉게 된다.
안정적인 직업과 높은 소득을 확보한 사람들이야 보험료 부담이 줄어들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커진다.
그런데 LO는 왜 조용한 것일까. LO는 왜 이들처럼 분노하지 않는 것일까. SAC는 LO에 함께 집회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했다.
SAC의 기관지 편집장을 맡고 있는 토피 마르구손은 LO를 “가장 거대한 조직이면서 가장 힘없는 조직”이라고 평가했다.
집권 사민당과 오랜 유착관계를 맺어오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LO는 너무 크기 때문에 LO가 파업을 하면 나라 전체가 박살난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나라 전체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요구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다.
노조 조직률은 높은데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고 정작 투쟁 경험도 전혀 없다.
LO는 사회적 연대라는 명분으로 토론을 막고 있다.
정말 웃기는 짓이다.
” LO는 찰츠요바덴 협약 이후 투쟁을 조직하기 보다는 개별기업 단위의 투쟁을 차단하거나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왔다.
과거에는 이런 시스템이 LO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해줬지만 SAF가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간 뒤로는 그 의미가 크게 줄어들었다.
임금협상은 개별기업 단위로 내려갔고 LO의 역할은 유명무실해졌다.
스웨덴에서 개별기업 노조는 법적으로 파업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
개별기업 노조에서 LO의 동의 없이 불법파업을 할 경우 LO가 기업에 그 손실을 보전해주는 규정이 있을 정도다.
물론 기업이 협약을 깼을 때는 노조에 배상을 해야 한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갖지만 LO가 실제로 파업을 벌인 건 1909년 이래 거의 100년 동안 단 한 건도 없었다.
“100년 전의 파업은 실패했다.
무조건 항복하고 직장에 복귀해서 결국 더 나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덕분에 노조 조직률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이를 회복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 LO 기관지 편집장인 토미 오버르의 말이다.
그는 새 정부의 공세에 맞서 LO가 다시 파업을 벌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LO보다 규모는 작지만 사무직노조연맹(TCO)이나 공공부문노조연맹(SAKO)은 이미 개별 임금협상으로 돌아선 상태다.
전직 노동연구원 교수였던 요란 굴린은 “기업연합이 세 노조연맹을 이간질해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번 총선에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우파연합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노동운동의 분열과 우파연합의 집권, 실업보험의 축소는 그래서 서로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LO 중심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한때 경제의 주축이었지만 이제는 복지시스템의 수혜자가 됐다.
사회적 합의와 연대가 충분히 살아 있다면 이들은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 더 질 높은 일자리, 이를테면 서비스 부문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혜택보다는 기여가 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이런 시스템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느냐다.
우파연합의 집권으로 시작된 최근의 변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사회적 합의와 연대를 이야기하고 여전히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이미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사회적 연대, 누구나 그게 좋은 건 안다.
스웨덴에서는 심지어 우파들도 사회적 연대를 부르짖는다.
그런데 다들 말로만 사회적 연대를 외칠 뿐 계급 충돌 문제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아무도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적 연대가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 스톡홀름 대학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페터 닐슨의 말이다.
“사회적 연대가 본질 은폐” 실업보험이 축소되면 이들 대학생들은 당장 보험료가 3배 이상 뛰어오르게 된다.
청년 실업이 16%를 웃도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칫 질 낮은 일자리를 맴도는 근로빈곤층이나 장기실업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대학생들이 SAC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LO가 왜 무관심할까. LO 노조 간부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안정적인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들 역시 사회적 연대만 외칠 뿐 정작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더 답답한 것은 아무도 나서서 싸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다.
” LO는 12월 14일에 대대적인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1만5천명을 모으겠다는 계획이지만 집회 한 번으로 새 정부의 정책을 바꿀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다.
1992년 우파연합이 잠깐 집권 때는 LO 내부에서 정치파업을 벌이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집행부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이 있다.
“찰츠요바덴 협약 때는 평화라는 무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안 먹힌다.
사민당이나 LO에게는 아무런 새로운 전략이 없다.
만들려면 1년 정도 걸릴 거다.
현재까지는 내놓을 만한 게 없다.
” 다시 토미 오버르의 이야기다.
“그때는 파업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LO가 파업을 할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스톡홀름=글·사진 이정환 기자 cool@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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