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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존경받는 황혼 ‘골드 시니어’ (1)
[커버스토리] 존경받는 황혼 ‘골드 시니어’ (1)
  • 이윤찬 기자
  • 승인 2007.06.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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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칩’ 은퇴 CEO] 이필곤·오세희·최성래 등 전직 CEO … 경영 노하우 전수, 사회공헌으로 ‘진면목’ 과시 티븐 볼렌바흐는 세계적 호텔 체인업체 ‘힐튼 호텔즈 코프’를 11년간 이끌어온 CEO다.
그의 탁월한 통찰력과 폭넓은 경험은 힐튼호텔의 자랑이자 밑거름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도도한 흐름 앞에 장사는 따로 없는 법. 지난해 정년을 맞이한 그 역시 은퇴를 피하지 못했다.
힐튼호텔로선 역량 있는 선장을 잃었을 터. 그렇지만 아쉬운 기색이 전혀 없다.
볼렌바흐가 2010년까지 힐튼그룹 이사회의 공동의장을 맡아 장기전략 수립 등에 도움을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비록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볼렌바흐는 여전히 힐튼의 훌륭한 조력자다.
주목받는 그들 ‘골드 시니어’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말은 ‘이상’(理想)에 가까웠다.
정년을 넘은 시니어들은 은퇴를 수순으로 여겼다.
은퇴 후 삶도 천편일률적이었다.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것. “은퇴한 시니어들이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은 손자, 손녀의 재롱을 보는 것”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지금은 다르다.
의학의 발달은 삶을 연장시켰고, 은퇴 시니어들에겐 ‘제2의 인생’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볼렌바흐처럼 의미 있는 황혼을 보내는 ‘골드 시니어족(族)’이 부쩍 많아진 이유다.
‘골드 시니어’란 은퇴 후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후세대에게 전수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필곤 전 삼성 중국본사 회장, 오세희 전 LG홈쇼핑(현 GS홈쇼핑) 대표, 최성래 전 삼성석유화학 사장, 진정미 전 KB창업투자 중국사업본부장(관련 기사 25면) 등은 대표적인 국내 ‘골드 시니어’들이다.
완벽한 골드 시니어 꿈꾸는 이·필·곤 전 삼성 중국본사 회장 이필곤(66) 전 삼성 중국본사 회장은 ‘대한민국호(號)’가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던 70~90년대, 삼성을 대표하는 CEO 중 한명이었다.
삼성의 야심만만한 프로젝트 ‘중국 진출전략’을 진두지휘한 주인공도 그다.
이 전 회장은 “삼성에서 누구 보다 많은 일을 했다”며 전성기 시절을 회상했다.
그런 그에게 은퇴는 어떤 의미였을까. “참 바쁘게 살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죠.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본 셈이죠. 받은 만큼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쯤, 은퇴가 눈앞에 와 있더라구요. 막중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 은퇴를 앞둔 시점(99년), 이 전 회장은 ‘고민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사회로부터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영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어도 후배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아 망설이기 일쑤였다.
장애물이 되기는 싫었던 것. 그래서 은퇴 초기엔 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동북하 산림포럼(환경 관련)·한중고려협회 등 NGO 활동만 했다.
말 그대로 사회공헌 활동이었다.
△이필곤 전 삼성 중국본사 회장은 은퇴 후 중소기업에게 해외 진출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임영무 기자
“조금 아쉬웠지만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선 NGO 활동이 적격이라고 생각했죠. 사회경험을 어느 정도 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구요.”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제대로 살 수 있는 법. 이 전 회장은 지금 자신의 CEO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마다치 않고 있다.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경영자문(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것. 디지털 데이터방송 서비스업체 ㈜알티캐스트의 회장으로 재임한 지 어느덧 7년이 훌쩍 지났다.
전경련 중소기업경영자문단의 위원장으로도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전경련 중소기업경영자문단은 퇴직 CEO의 경험과 노하우를 중소기업에 전수하기 위해 지난 2004년 7월 발족한 순수 자문집단이다.
현재 82명의 자문위원이 활동하고 있는데, 모두 무보수로 자문을 하고 있다(관련 기사 26~29면). 이 전 회장은 주로 중소기업의 해외진출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해외진출에 애를 먹고 있는 중소기업에 ‘맞춤형 돌파구’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경영지식이 중소기업 성장의 밀알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아쉬움이 아직 많다.
중소기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선배 CEO들의 경험과 식견을 수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소기업 스스로 ‘폐쇄성’을 극복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만큼 그는 후세대들의 성장에 일조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이 전 회장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문뜩 상공부 차관과 데이콤 회장을 지낸 박운서씨의 얘기를 꺼냈다.
“박운서씨가 필리핀 오지에서 ‘모리아 자립선교재단’을 만들어 현지 주민들을 교육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이 많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은퇴한 CEO들이 나아가야 할 길인 것 같습니다.
” 그렇다.
박운서씨의 길이 바로 이 전 회장이 지향하는 골드 시니어의 진정한 삶일지 모른다.
‘간이명패’ 앞에서도 당당한 오·세·희 GS홈쇼핑 전 대표 30년간 LG그룹에 재직했던 LG홈쇼핑(현 GS홈쇼핑) 오세희(67) 전 대표는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 교수의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세계적 석학으로 명성을 떨친 드러커 교수는 60세 이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가장 성숙한 경영전략을 펼친 것도 이 때부터라고 하더군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지 않나요.” 오 전 대표는 경험을 중시한다.
물론 맹종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움 없는 경험은 무용지물이라고 말한다.
경험과 새로움이 합쳐질 때보다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그의 확신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97년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조찬모임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그것도 한 달에 8번 이상 참석할 정도로 열성적이다.
“후세들에게 도움을 주는 골드 시니어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선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조찬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 오 전 대표는 인생의 ‘황혼기’를 값지게 보내고 있는 전직 CEO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LG그룹 출신 CEO들과 힘을 모아 ‘그린우드21’이라는 컨설팅 업체를 만들었고, 전경련 중소기업경영자문단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30년 경영 노하우를 후세대에게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년에 대략 10여개의 중소기업을 컨설팅하는데 “보람이 상당히 크다”며 뿌듯해 한다.
골드 시니어로서의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후배 CEO들이 겪고 있는 문제점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족집게 과외선생’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자동차 부품업체 ㈜동아정기의 ‘부활기’는 오 전 대표의 탁월한 자문능력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은퇴 CEO는 친절한 ‘과외선생님’ 2004년 회사 정리절차까지 결정될 정도로 벼랑 끝에 몰렸던 동아전기는 현재 자생능력을 갖추는 등 안정을 되찾고 있다.
최근엔 M&A협상도 줄기차게 들어온다고 한다.
그만큼 회사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반증이다.
무엇보다 자금조달 능력이 2005년 6690만원에서 14억원으로 증대된 데다, 생산제품 불량률이 6.56%에서 0.275%로 급감한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다.
오 전 대표를 위시한 중소기업경영자문단원들이 경영관리 및 재무관리·노사문제·영업문제·기술문제 등 분야별 문제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1년에 걸쳐 컨설팅을 해준 덕분이라는 평가다.
이런 오 전 대표에겐 또 다른 꿈이 있다.
진정한 골드 시니어가 되는 게 마지막 소망이자 바람이다.
그래서 그는 워크숍을 수시로 개최하고, 다양한 비공식 모임을 만드는데도 불철주야 애쓰고 있다.
오 전 대표가 최근 구성한 모임은 창조와 혁신을 공부하기 위한 ‘CI포럼’(Creative & innonation)이다.
여기엔 최진만 전 창업공업(기아자동차 계열사) 대표, 박명남 전 한신공영 대표 등 10여명의 전직 CEO들이 참여하고 있다.
△오세희 전 LG홈쇼핑(현 GS홈쇼핑) 대표는 전경련 중소기업 경영자문단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임영무 기자
“우리들은 IMF를 경험한 세대입니다.
다른 세대는 배울 수 없는 위기관리 능력을 함양했고 그에 걸맞은 경영 노하우를 터득했습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후배들에게 이 같은 경영 노하우와 경험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 전경련 1층 중소기업협력센터 한쪽에 마련된 그의 사무실엔 ‘오세희’라는 이름 석자가 다소 초라하게 써 있는 명패가 놓여있다.
“씁쓸한 인생의 뒤안길이 느껴지는 명패인 것 같다”는 질문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패 아닙니까”라며 웃는다.
그러면서 “후세대들에게 뭔가를 전수하는 것만큼 가슴 뿌듯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진짜 ‘골드 시니어’를 꿈꾸는 오 전 대표의 진면목이 읽히는 대목이다.
이 전 회장, 오 전 대표의 사례에서 보듯, ‘골드 시니어들’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식지 않은 ‘열정’과 풍부한 ‘경험’으로 후세대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전경련 중소기업경영자문단 지원팀 김한준 연구원은 “골드 시니어들은 고기를 잡아주기 보다는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며 “이들은 후세대들의 좋은 과외선생님이자 조력자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골드 시니어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들이 갖는 사회적·경제적 의미 때문이다.
무엇보다 골드 시니어들의 경험과 식견은 후세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그간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은퇴자가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는 점도 ‘의미 있다’는 평가다.
실제 골드 시니어의 활동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어, 눈길을 끈다.
전경련은 최근 중소기업경영자문단이 진행한 ‘중소기업 혁신스쿨’(CEO 출신인 골드 시니어들이 중소기업 임직원을 교육하는 활동)의 만족도를 조사했는데, 그 평가가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강의 만족도’는 놀랍게도 90%에 육박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그림1). ‘업무에 도움이 됐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에서도 응답자의 41%가 ‘매우 도움이 됐다’고 말했고, ‘도움이 됐다’는 견해도 40%를 넘어섰다.
반면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응답은 불과 2%에 그쳐, 대조를 이뤘다(그림2). ‘골드 시니어의 교육에 만족한 이유’로는 내용의 유용성(41%), 경험공유(34%), 사례연구(23%) 등이 거론됐다(그림3). 이는 골드 시니어들의 교육이 그만큼 생생하게 전달됐음을 의미하는 결과다.
이에 대해 김한준 연구원은 “골드 시니어들의 조언엔 거의 모든 경영 노하우가 들어있다”며 “때문에 불가측한 경영환경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소기업에게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최근 골드 시니어들의 과외 수요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들의 활동이 알찬 열매를 맺고 있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의미 있는 황혼 보내는 골드 시니어 골드 시니어는 후세대들에겐 ‘거울’ 같은 존재다.
이들을 보면서 후세대들은 과거를 배우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또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래환경에 딱 맞는 경영전략을 구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골드 시니어들의 열성적 활동은 중요한 경제요소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생의 후반기를 후세대를 위해 보내고 있는 골드 시니어들. 이들이 목 놓아 부르는 ‘황혼가’(黃昏歌)가 유독 위엄 있고 의미 있게 들리는 것도 이런 이유인 것 같다.
이윤찬 기자 chan4877@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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