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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기술주] 경제학으로 본 콘텐츠 유료화
[첨단기술주] 경제학으로 본 콘텐츠 유료화
  • 신동녘(사이버IT애널리스트)
  • 승인 2000.11.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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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는 돈이다.
얼마 전까지 이 등식은 정확히 맞았다.
아마 앞으로도 이 등식은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만큼은 이 등식이 성립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디지털이란 기술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복제하려면 미술의 대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곳 밥을 십수년은 먹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복제품이 진품과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복사기로 복사한 것을 복사하고 또 복사하면 글씨조차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북한 인민가수가 부른 꾀꼬리 같은 노래 <휘파람>도 카세트로 몇번만 연달아 복사하면 노파의 천식걸린 목소리로 변한다.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복제할 때마다 원본의 일부가 손실되고, 복제한 것을 또 복제할 때에는 손실정보가 지수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콘텐츠=돈’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었다.
콘텐츠의 가격은 0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에서는 이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내용이건 일단 디지털로 만들면 그 뒤로는 수천 수만번을 복제해도 원본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도 추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더구나 인터넷의 고속화와 확산으로 복제된 콘텐츠가 쉽고 빠르게 퍼져나간다(0양의 경우를 보라). 따라서 콘텐츠의 진입장벽은 0에 가깝고 가격 또한 0으로 수렴한다.
그러기 전에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겠지만 말이다.
최근 닷컴기업들 사이에 콘텐츠 유료화 바람이 불고 있다.
과연 인터넷 콘텐츠의 유료화가 가능할까. 유료화라고 하면 콘텐츠에 적정한 가격을 매기겠다는 얘긴데, 우선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가격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자. 가격은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나의 효용이 증가하는 만큼 응당 지불해야 하는 화폐의 양’을 말한다.
예컨대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과에 높은 가격을 지불하려 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낮은 가격을 지불하려 한다.
아담 스미스는 이 가격이 소비자와 공급자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유무형의 상품에 대해 효용이 변화하면 여기에는 에누리없이 가격이 지불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렇게 살벌한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가격을 물리지 않는 몇가지 유형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가격을 물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물리는 것이다.
첫번째는 물이나 공기 같은 ‘자유재’이다.
이것은 원래 주인이 없고 희소하지도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이용할 수가 있다.
봉이 김선달을 천하의 사기꾼으로 보는 이유도 이런 자유재를 돈 받고 팔았기 때문이다.
요즘엔 깨끗한 물과 공기가 희소해지고 있기 때문에 생수장사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이 부분은 자유재에 해당한다.
두번째는 ‘공공재’이다.
공공재는 특정한 사람의 사용을 막지도 않고, 내가 어떤 상품을 소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효용이 감소하지 않는 상품을 말한다.
조금 유식한 말로 앞의 경우를 비배제성, 뒤의 경우를 비경합성이라고 한다.
예컨대 밤거리의 가로등은 부자라고 해서 많이 비춰주고 거지라고 해서 적게 비춰주지 않는다.
또 나한테 빛이 온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빛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공공재는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의 이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통상 정부가 세금을 걷어 설치하고 무료로 제공한다.
세번째는 ‘외부성 상품’이다.
옆집의 꽃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면(효용이 증가했다면) 당연히 그만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돈을 받아낼 방법이 없다.
이처럼 어떤 상품 때문에 효용이 증가했는데도 가격을 지불하지 않는 경우를 외부성 재화라고 한다.
특히 인터넷이나 전화처럼 가입자가 증가하면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나 기존 가입자의 효용이 증가하지만 이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경우를 네트워크 외부성이라고 말한다.
인터넷 콘텐츠의 유료화, 가능한가 그럼 인터넷 콘텐츠가 무료로 제공되는 현재 상황은 위의 어느 경우에 해당할까? 인터넷 콘텐츠가 주인도 없고 주위에 너무 풍부해 돈을 받고 팔았다간 봉이 김선달 소리를 듣는 자유재일까? 물론 아니다.
네트워크 외부성은 관련은 있지만 핵심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공공재인가? 현재 상황에서는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은 누구나 콘텐츠에 접근이 가능하고(비배제성) 내가 콘텐츠 내용을 읽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못 읽는 것은 아니므로(비경합성) 공공재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가 개입해 세금을 받고 콘텐츠를 공급해야 할텐데 세계적으로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나라는 한군데도 없다.
인터넷 콘텐츠는 공공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터넷 콘텐츠가 공공재가 아닌데도 상업 텔레비전처럼 광고수익에만 의존하는 공공재 행동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MBC나 SBS 같은 상업 텔레비전 방송은 광고료로 수익을 얻어 전파를 발사한다.
전파는 광고를 보지 않는 집을 배제하거나 한 집이 오래 본다고 다른 집에는 가지 않는 게 아니다.
따라서 공공재이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이용자가 돈을 내지 않아도 광고수익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
반면 인터넷 콘텐츠의 경우 야후와 같은 대형 포털사이트의 광고수익이 연간 70억원에 불과할 정도로 광고시장이 작다.
더욱이 공공재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효용(기분)을 속이는 ‘무임승차’가 발생한다.
돈을 안 낸 사람을 배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사실 유용한 정보이면서도 이 정보에 돈을 내겠냐고 물어보면 당연이 ‘NO’라고 말한다.
인터넷 콘텐츠가 지금처럼 공공재 기분을 내다간 조만간 다 망할 수밖에 없다.
이용자가 자신의 효용을 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콘텐츠 내용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유료 ID로 무임승차자를 배제함으로써 콘텐츠를 보호하는 진입장벽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선 콘텐츠를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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