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한 인간, 한 국가에 의한 정복을 막기 위해 수만개의 인종, 종교, 문화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주인공은 오직 ‘신’뿐이다.
한 때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칭기즈칸의 존재가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우그룹을 미국 <포춘지>에서 선정하는 세계 20대 기업 중 하나로 키웠던 김우중도 그런 의미에서 괄목할 만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학창시절 신문팔이로 끼니를 때우던 그가 ‘세계 속의 대우’를 만들어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 아닐까…. 같지만 다른 그들… 칭기즈칸과 김우중은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것도 같고, ‘나홀로’ 험난한 인생역정을 걸어온 것 또한 닮은꼴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으니…. 칭기즈칸은 ‘정치’에 강했던 반면 김우중은 ‘정치’ 때문에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칭기즈칸은 ‘정치적 밀월관계’를 절묘하게 이용한 데 반해 김우중은 이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대체 무슨 말일까. 일반적으로 칭기즈칸 하면 ‘약탈자’ 또는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고려시대 ‘대몽항쟁’ 때문에 비롯된 ‘잔상’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칭기즈칸은 ‘후덕한’ 지도자였다.
관대하고 포용력 넘치는 리더로 불렸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신뢰하는 우직함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독특한 점은 ‘핏줄’보단 ‘능력’을 보다 우선시 했다는 것이다.
몇몇 전문가들이 그를 가리켜 ‘혁신형’리더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그만큼 칭기즈칸은 ‘정치’에 능했다.
그렇다면 김우중은? 아쉽게도(?)도 그는 ‘정치’ 탓에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모두 경험했다.
정치적 밀월관계로 때론 ‘흥’을 때론 ‘쇠’를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탁월한 ‘비즈니스맨’으로 손꼽혔던 김우중이 ‘정치판’에 얽히고설키기 시작했던 92년으로 돌아가 보자. 때는 1월16일. 매서운 ‘삭풍’(朔風)이 불어 유독 춥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김우중은 그날 ‘동토의 도시’ 평양에 전격 방문했다.
북한 당국이 남북경제협력 파트너로 김우중과 대우그룹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평양에 도착한지 5일 후, 김일성도 만났다.
기적이었다.
최고 권력자 ‘대통령’조차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그날 김우중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앞으로 (평양을) 자기 집 드나들 듯 자주 와라. 6개월은 남쪽에 살고 6개월은 북쪽에 살면 되지 않느냐.” 김우중은 대북사업을 세계경영의 ‘완결판’으로 만들고자 했다.
북한의 값싼 노동력 그리고 풍부한 천연자원을 이용하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세상은 김우중의 ‘뜻’과 반대로 돌아갔다.
북한 방문을 기점으로 그는 ‘경제정글’이 아닌 추악한 ‘정치판’에서 뛰어노는 애절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북한을 방문한 직후인 92년 봄의 일이다.
김우중은 ‘정치지형’의 핵심변수로 떠올랐다.
노태우 정부는 이미 후계자로 YS(김영삼)를 지목한 상태였고 DJ(김대중)와 정주영(전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출사표를 던질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야당의 중진급 의원 A씨를 비롯한 3~4명이 수시로 김우중을 찾아왔다.
대권에 출마해 달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YS의 ‘대항마’로 김우중 만한 인물이 없다고 여겼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로 얻은 대중적 인기에 김일성까지 만났으니 그만한 ‘대권후보’도 찾을 수 없었을 게다.
김우중은 겉으론 “나는 정치를 모릅니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속내는 달랐다.
내심 대권도전을 꾀했고 측근들도 이를 적극 동조했다.
그러나 김우중의 대권도전을 한사코 말린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당대 최고의 ‘역술인’들이었다.
당시 대우그룹 모 관계자가 만난 두명의 역술인들의 말을 정리해 본다.
역술인 A씨: 김우중의 관상은 시베리아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상입니다.
그러나 이 호랑이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가죽도 남기지 못할 운명입니다.
최악의 ‘관상운’ 같지만 이는 약과다.
두번째 만난 역술인 B씨는 아예 ‘대권도전은 꿈도 꾸지 마라’는 일침을 가한다.
역술인 B씨: (김우중은) 제갈공명과 방통의 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지략이 탁월하지만 ‘정상’에 우뚝 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천하를 눈앞에 뒀던 제갈공명은 측근들의 배신 때문에 좌절합니다.
방통은 말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고 맙니다.
김우중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김우중은 이러한 보고를 받고 ‘껄껄’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관상이 인생을 좌우할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천운’은 피할 수 없는 법. 그의 대권도전은 ‘외압’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92년 중순, 조심스럽게 대권도전을 타진하던 김우중 앞에 크나큰 장벽이 나타났다.
노태우 정부가 대우그룹을 향해 ‘세무조사’라는 칼을 뽑아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세청이 밝혀낸 대우그룹의 탈세금액은 총 700억원. 지금으로 따지면 대략 수천억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탈세액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를 빌미로 김우중에게 ‘대권포기’를 종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솔로몬의 선택’을 해야 했다.
700억원을 납부하고 대권에 도전하느냐, 아니면 조용히 권부(權府)의 마차에 동승하느냐…. 노태우 정부의 제안이 들어온 지 10여일 후. 김우중은 스스로 대권포기를 선언하고 대우그룹을 선택했다.
정치적 밀월관계를 택했던 셈이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또 다른 패착으로 이어질 지 누가 알았으랴. 노태우 정부의 빅딜 카드 ‘세무조사’ 한 때 대우그룹은 자동차, 의류, 상품, 조선, 건설, 전자 등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대우 브랜드만 있으면 모든 게 통하는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엔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대우그룹이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 김우중은 권력자들과 늘 한배를 탔다.
심지어 대우그룹이 경영난에 휩싸여 부도 직전에 내몰렸을 때조차 정상적인 방법 대신 DJ와의 소통(疏通)으로 해결하려 했다.
깊고도 질긴 ‘정경유착’의 고리가 김우중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칭기즈칸과 김우중은 일면 비슷하지만 판이하게 다른 측면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의 경영철학은 어땠을까. 한 때 세계정복을 꿈꿨던 두 사람의 ‘같지만 다른’ 경영철학을 살펴보도록 한다.
글= 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정리=이윤찬 기자 chan4877@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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