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부자재 매입가격이 올라도 납품단가에 반영해 달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다. 괜히 나섰다가 거래가 끊기기라도 하면 회사 식구들은 누가 책임지나.”
화장품 원부자재 업체 K사장은 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는 “화장품 원부자재와 원재료 수입가격이 대폭 올랐지만 납품단가 인상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업과 이름이 익명으로 처리되는가에 대해 재차 확인했다.
K사장이 이렇게 몸을 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최근 업계 내에는 장기간 별 탈없이 거래관계를 유지해왔음에도 납품단가 인상을 요구해 거래가 끊겼다는 등의 소문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올 봄 납품단가 인상을 둘러싸고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전자, 자동차, 건설업계의 상황이 화장품업계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선 중소기업이 가장 원하는 점은 납품단가 현실화다.
원부자재업체 사장 Y씨는 “납품단가의 지속적인 인하 압박은 화장품 산업 전반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당장 직원들 월급을 걱정하는 판에 미래를 위한 R&D 투자는 그야말로 ‘공자님 말씀’”이라고 덧붙였다.
“원부자재 가격인상에 피가 마른다”
원부자재업체 사장 L씨는 요즘 부쩍 밤잠이 없어졌다고 전했다.
원부자재 가격인상 때문에 채산성이 악화일로로 치달으면서 기업의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L사장뿐만이 아니다. 기업별 자산 상태에 따라 체감온도나 여력이 차이는 있지만 요즘 관련 업체들은 거의 모두 똑같은 이유로 신음하고 있다. 원재료비와 원부자재가 인상으로 인해 국내 화장품 산업의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기업들이 휘청거리는 셈이다.
대다수 원부자재 관련 기업들은 “원부자재 가격이 10~30%가량 인상됨에 따라 관련 기업의 경영압박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7월 31일 기준으로 1년 새 유리용기 12%, 사출용 18%, 튜브 15%, 파우치 15%, 접시 13% 등 용기 가격이 12~18% 인상됐다. 마개도 박킹 10%, 커버실러 10%, 펌프 15%, 사출캡 18%, 금속캡 13% 등 10~18% 올랐다. 또, 라벨은 10% 인상됐으며 퍼프 10%, 주걱 18%, 시트가 15% 올랐다.
포장재로 쓰이는 지류 관련 부자재는 중국수출로 인한 폐지자원 고갈 및 원지, 원단 국제가격 상승 때문에 작년 8월과 12월 2차례 인상된 데 이어 올 7월에도 인상돼 1년 사이에 3차례나 인상됐다.
이 과정에서 포장재에 해당하는 수축필름(15%), 개입상자(17%), 완충재(14%), 세트상자(15%), 포밍(12%), 박스류(20%), 지퍼백(15%), 비닐케이스(15%) 등의 가격도 올랐다.
화장품 원재료 가격도 인상됐다.
대표적인 재료는 비타민류다. 42~248%(VITAMIN E ACETATE)까지 인상됐으며 지속적인 인상이 전망되고 있다. 계면활성제나 오일 및 왁스는 유가인상의 직격탄을 맞았다. 올 7월 31일 기준으로 1년 간 각각 16%와 22% 인상됐다.
이 같은 인상폭은 유가인상으로 바이오디젤, 바이오에탄올 등 대체에너지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제조업체의 원료 수급이 불안정해졌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유가인상에 따른 물류비 및 고정 비용 증가와 석유 정재 시 추출되는 오일류 가격 인상 등에 따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메탄올 가격의 급등에 따라 말단 제품인 실리콘은 13% 올랐으며, 환율급등과 엔화 강세의 영향에 따라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는 분체 역시 19% 인상됐다. 게다가 기업별 사업영역에 따른 특수성을 고려하면 인상률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경우도 있다.
화장품 용기의 주요 재질인 플라스틱 가격의 경우 많게는 100%까지 상승했다.
한 기업의 고위관계자는 “재활용 플라스틱의 경우 작년 여름 kg당 550원에서 현재 1100원으로 100% 올랐다”며 “신제품의 경우도 뚜껑에 쓰이는 폴리프로필렌(PP)과 용기에 쓰이는 폴리에틸렌(PE) 모두 2007년 여름 kg당 1500원에서 2150원으로 상승했다”고 전했다.
H사의 J이사는 “원자재 가격이 기본적으로 25%, 특수한 경우 40%까지도 올랐다”며 “용기의 경우 특성상 50%까지 오른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화장품 업계의 주요 기업들은 소비자가격 인상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납품 단가인상도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원부자재 기업 등 납품업체들이 대부분 계열사(관계사)라고 밝힌 A사 관계자는 “제품원가 인상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기보다는 내부적으로 비용절감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B사 역시 “납품 단가 인상 요구가 있지만 당장 반영은 쉽지 않다”고 밝혔다.
문제는 주요기업들의 ‘납품단가 인상 없는 내핍경영’은 자사의 수익성 확보를 위한 것이지 협력업체들의 채산성 개선과는 상관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는 중소협력업체에 대한 R&D지원이나 경영관리 노하우 전수 등의 상생경영이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국내 화장품 기업간 상생협력 모델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주요 대기업 CEO는 물론 경제연구소, 학계의 전문가들 역시 각종 세미나와 컨퍼런스 등에서 상생협력을 강조한다.
이들은 “협력업체의 역량강화는 완제품업체의 품질력 강화와 직결되기 때문에 대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특히 연구개발(R&D)이 생명인 중소기업에 대기업이 상생모델을 제시할 경우 산업의 시너지가 커질 것”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소비자가격 인상 어려워 못 올려줘”
현대경제연구원 김주현 원장은 “대기업의 지원으로 인해 중소기업의 역량이 강화된다면 품질력이 높아지고 대기업은 이를 바탕으로 시장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며 “이런 선순환구조가 이뤄지면 대중소 기업 모두가 살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진다면 기업의 경쟁력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현대자동차 김동진 부회장 역시 “기술발전과 제품교체 사이클이 빨라진 요즘 추세를 감안하면 협력업체의 경쟁력 저하는 완성품의 품질경쟁력 저하와 직결된다”며 “중소협력업체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술지원과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 등 경영관리 기법 전수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최근 정부가 입법예고한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는 원자재가격이 오르면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서로 협의하는 것을 의무화한다는 내용이지만 그동안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거래관행에서 한참 비켜서 있어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관계자는 “‘납품가격 원가 연동제’ 등의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 스스로의 상생의지 마저 없다면 산업의 허리가 부실해질 것”이라며 “중소기업이 부실해질 경우 산업경쟁력 강화 운운은 단지 구호일 뿐”이고 지적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 고위 관계자는 “전 산업에 걸쳐 원재료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중소기업들은 환율로 인해 고전이 예상된다”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모델을 구축해 위기를 슬기롭게 해쳐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속타는’ 중저가 브랜드 다만 고가 브랜드는 기존 마진폭이 가격충격으로부터 일정 정도 완충작용을 하겠지만 중저가 브랜드들은 충격이 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중저가 브랜드들은 나름대로 손익계산에 분주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할 경우 시장 점유율이 하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다. 조만간 시행될 병행수입이 국내 중저가 브랜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면서 이중 삼중의 파도가 덮쳐오지는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수입브랜드의 고위 관계자는 “병행수입이 시행돼 인터넷을 중심으로 수입 브랜드의 가격 파괴 바람이 불 경우 중저가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질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신규 저가 브랜드는 설상가상인 상황이다. 제조 단가가 한껏 인상된 상황인 데다 브랜드 인지도가 없는 신규브랜드의 경우 유통업체가 요구하는 마진의 폭이 기존 브랜드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시장진입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