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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지식창고]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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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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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정일, 김정일의 북한
그에 대한 허상이 깨지고 있다.
내성적이고 대인기피증이 있다던 그는 거리낌없이 남쪽 사람들을 만났다.
“공산주의자라도 도덕은 압니다”라며 남쪽 사람들의 선입관에 뼈있는 유머를 던지기도 했다.
그의 사생활까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괴팍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동안 듣고 배워왔던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엇을 근거로 나온 것이며, 또한 믿을 만한 것인가.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지음, 김영사 펴냄)은 그동안 탁한 색으로만 덧칠돼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곁에서…>는 80년대 초 제3국으로 망명했다가 한국에 들어온, ‘비공개 귀순자’ 신경완씨의 증언을 채록한 책이다.
신씨는 45년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대남사업부서의 부부장을 지낸 거물급 간부였다.
한때는 선전선동부에서 김정일을 ‘상사’로 모시기도 했을 정도로, 지근거리에서 그를 지켜본 인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증언은 여느 망명자들의 그것보다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심지어 완전히 반대되기도 한다.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에서 일하는 지은이 정창현씨는 98년 신경완씨가 세상을 뜰 때까지 2년 동안 그의 구술을 정리해왔다.
원만한 일처리 빨치산 원로들도 인정 신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선정되는 과정이나 통치능력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상당히 다르다.
애초 김일성 주석과 항일 빨치산 1세대들이 합의한 후계구도는 김일성-김영주-다음세대였다.
김정일은 후계구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67년부터 노동당 내부에서 ‘김영주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본격화하면서 김정일이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 당 조직비서였던 김영주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내부비판이 제기됐을 뿐 아니라,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불확실한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김일성의 두번째 부인인 김성애의 ‘안하무인’에 대해서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70년 제5차 당대회 준비과정에서 빨치산 원로들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세우기로 내부적으로 합의하고, 74년 마침내 공식적으로 그를 후계자로 결정한다.
빨치산 원로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어릴 때부터 김정일을 등에 업고 키운 끈끈한 정과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원로들의 ‘꼼꼼한’ 검증 절차를 통과한 김정일 자신의 능력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김정일은 69년부터 속성상 느슨할 수밖에 없는 문예부문에 뛰어들어 속도전, 사상전 등을 제시하며 방만한 일처리 방법과 생활태도를 대수술해 원로들의 인정을 받는다.
게다가 그는 당원로나 아랫사람들을 감동시켜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 천부적이었다.
신씨에 따르면, “신입당원 당증을 직접 사인해서 건네주거나, 당간부의 아이들이 외국어를 학습하는 경우 이를 기억해두었다가 녹음기를 구해준다든지 하는 일을 빈번하게” 했다.
“영화나 보도출판부문 간부들치고 시계나 냉장고 등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일을 몰아치게 시키고 나면 술자리를 마련해 꼭 풀어줬다.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평균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 정도는 술자리가 있게 마련이었다.
평소에는 술을 거의 먹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어색하면 가끔 맥주잔에 소주나 양주를 따라 먼저 마시고 다른 간부들한테 권유하기도 했다.
신씨는 이 때문에 서방전문가들에게는 파티를 즐기는 한량쯤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당·정·군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과 사상학습을 통해 차근차근 권력기반을 구축해나간다.
80년 10일10일 평양에서 개막된 노동당 6차대회에서 김정일은 처음으로 외부세계에 얼굴을 드러내는데, 신씨에 따르면 이는 후계체계 구축이 일단락됐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람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용인술 김정일 용인술의 독특한 점은 사람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일성이 간부들의 성추문이나 도덕적 흠에 엄격했던 반면, 김정일은 주체사상이나 유일지도체제를 반대하지 않는 한 다른 부분의 실수나 과오에는 대범한 편이었다.
짧게는 8개월, 길게는 2~3년 동안 당 간부들이 보이지 않다가도 수시로 복귀하는 것은 이런 김정일의 용인술 때문이다.
신씨는 이밖에도 한국언론이 김정일 체제를 비웃는 단골메뉴인 ‘기쁨조’의 실체에 대해서도 ‘오해’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는 성혜림이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도 의심하고 있으며, 이한영의 주장은 ‘부분적 오류’가 아니라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한다.
한 인물에 대한 정보가 어떻게 이처럼 극과 극을 달릴 수 있을까. <곁에서…>는 50년 동안의 분단과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만들어낸 간극이 얼마나 깊은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신씨가 유언처럼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할 것 같다.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일의 능력과 성향, 통치방식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남북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 수 있다.
P43 신경완은 기쁨조란 존재하지 않으며 외국인을 상대하는 공연단을 오해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 문제는 ‘기쁨조’에 대한 귀순자들의 증언이 아무런 여과없이 월간지나 주간지에 인용되면서 그 정확한 실체와 관계없이 김정일이 ‘호색한’이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는 점이다.
P123 1947년 혁명유가족들을 위한 평양 혁명가유자녀학원이 창설되고 이듬해에 만경대에 거대한 신축 건물을 세워 옮김으로써 만경대혁명학원이 개설됐다.
김정일은 자주 이곳에 가서 ‘형’들과 같이 어울려 지냈다.
이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자 강력한 지지세력으로 등장했다.
P216 김정일의 경제관은 개방지향적이고 현실적이다.
남쪽에서는 김정일이 경제지식에 문외한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출신의 경제엘리트이다.
대학 졸업 후 당요직에서 국가운영에 대한 체계적 수업을 받았던 경험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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