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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타임사이트] 그 섬에 가고 싶다
[킬링타임사이트] 그 섬에 가고 싶다
  • 김윤희
  • 승인 2000.11.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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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sland.haewoon.co.kr
지난해 끄트머리 여름. 내 취미는 <최신 전국여행 슈퍼 정보> 뒤적이기였다.
크지도 않은 대한민국을 조각조각 내어 지도와 함께 도로와 지역별 관광지, 자고 먹는 문제까지 친절하게 써놓은 관광안내 책자. 여행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기에 필수 아이템이라고 할까? 그런데 ‘일몰’이라는 글자가 내게 찌르르 전기를 보내왔다.
외연도-일몰이 아름다운 섬. 마침 꼭 함께 여행가고 싶은 친구도 있었는데, 그나 나나 어떻게 용을 써봐도 일출은 볼 수 없는 게으름뱅이니, 일몰이 각별한 전기를 보낼 밖에. 어쩌면 외연도라는 섬 제목이 신호를 보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후미진 곳에, 은밀하게 있을 듯한 섬.
우리는 후다닥 짐을 챙겨 서울역에서 만났다.
섬이라고는 뚝섬하고 여의도밖에 모르는 촌뜨기들이 관광안내 책자에 나오는 몇줄의 이야기를 굳게 믿은 것이다.
늦은 밤 기차에서 내린 우리는 대천해수욕장의 어두운 밤바다 앞에서 날밤을 새우고 이른 아침 대천항에서 외연도로 가는 배를 탔다.
꽤 멀리까지 배를 탔지 싶었다.
지루함에 몸이 뒤틀린 지도 한참일 때, 친구가 말했다.
“저기가 외연도인가 보다.
” 그러나 친구가 가리키는 곳에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어촌의 항구와 그 앞의 기름 뜬 바다.
그 뒤로는 몇 가구 안 들어선 작은 마을이 보일 뿐이었다.
역시 세상에 믿을 놈도 없고 믿을 책도 없고 믿을 정보도 없다니까. 게다가 아름다운 동백숲이라고? 뭐가 뭔지 모르게 뒤엉켜 있는 섬안의 작은 산(?)에는 흑염소가 어슬렁대는데, 제대로 바다 구경 한번하려면 흑염소 눈치 보면서 그 험악한 산세를 헤쳐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을 안의 유일한 식당이자 술집을 겸한 민박집에서는 아줌마가 먼데서 오신 손님이라며 우럭에, 새우튀김에 떡볶이까지 팍팍 인심을 썼는데, 계산할 때 보면 언제나 따따블이다.
우린 적당히 먹고 적당히 내고 싶었던 건데. 쩝. 위장과 주머니가 부담스러워 한끼 정도는 거르고 싶어도, 워낙 손바닥만한 마을이라, 그 집 어린 아들은 우리를 끼니 때마다 단박에 찾아냈다.
막다른 골목에서 숨바꼭질하는 거와 비슷하다.
우리가 짐을 푼 방의 바로 옆방에는 뭍에서 온 일꾼이라며, 장정 두명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밤이면 팔뚝에 그린 희한한 문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속옷 바람으로 나다니면서. 그들과 변변한 말 한마디 오간 적 없었지만 내가 영화나 TV, 만화 따위에서 ‘학습’한 것을 실행에 옮기면 대충 이렇다.
팔뚝에 그린 용을 보면 알아서 기죽기. 낚시꾼들은 그 섬에서 재미도 꽤 보는 모양이지만 우리들이야 그저 사진에서 본 그림 같은 섬에서 잠시 머물고 싶었을 뿐. 외연도는 이런 우리 기대를 보기좋게 걷어찼다.
그러나 땀을 흘리며 작은 산을 넘으면 물고기가 파닥이는 시원한 바다가 뻗어 있고, 해가 지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마당인지 모르도록 동네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돗자리를 펴는 정겨운 여름 풍치가 있었다.
식당 아줌마의 온갖 해물요리는 그 내용의 실함과 싱싱함을 서울 음식점과 비교해볼 때 절대적으로 저렴했다.
작은 어촌마을을 물들이는 일몰은 상상 속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평화로웠다.
외연항에서 다시 뭍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는 하늘이 비라도 심하게 뿌려 나를 이곳에 발묶어주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으니까. 물론 옆에는 막 배에서 내린 20대 초반 한 무리가 서로에게 책임을 물으며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누가 오자고 했어? 놀 데도 없잖아.” 그곳은 섬이었다.
이유 없이 그리운 냄새를 풍기는 곳. 수평선을 도닥이며 바다 위에 태연하게 서 있는 땅. 어쩌면 섬이라는 이유만으로 외연도는 이미 훌륭한 여행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툭하면 <섬여행 전문 웹진>을 뒤적인다.
‘섬여행 정보검색’을 클릭하여 지도 위에 나타난 섬들을 구경하면서 여행을 꿈꾸는 것이다.
섬들의 사진이 제공되는 ‘포토 갤러리’를 클릭하면, 가고 싶은 섬에 대한 적당한 환상 내지는 망상을 무한정 키울 수도 있다.
(사진은 절대로 객관적이지 못하니까.) 섬을 여행할 때 가장 성가신 것은 역시 교통편. ‘여객선 이용정보’는 가상이든 실제든 여행계획을 잡는 데 결정적 메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풍이라도 콱 몰아쳐서 섬에서 한동안 빠져나올 수 없기를 기대한다면 ‘바다의 날씨’를 클릭하여 스케줄을 맞추어본다.
흠 요때 즈음 가서 요때 나오는 걸로 날을 잡으면, 돌아오기 한동안 힘들겠군, 큭큭. 월차나 짧은 휴가를 이용하여 가는 여행이라면 끝내주겠지? 설마 직장상사가 “수영이라도 해서 돌아와. 배 없다고 결근할 거야?!” 하진 않을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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