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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역사의 달②] 미국 노예 해방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라스
[미국 흑인 역사의 달②] 미국 노예 해방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라스
  • 허유진 미국 통신원
  • 승인 2020.10.09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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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노예 해방의 지평 연 노예제 폐지 운동가
노예 제도 폐지 후에도 흑인들의 고된 노동과 정치참여 제한은 계속돼

미국 흑인 역사의 달기획기사는 3번에 걸쳐 연재됩니다. 미국의 아픈 역사로 새겨진 흑인 노예,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인종차별 문제의 출발점이기도 한 흑인 역사와 그들의 삶과 애환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번 글은 연재 두 번째입니다. - 편집자 주

2020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미국 노예 무역 이야기

2020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미국 노예 해방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

20202월 미국 흑인 역사의 달, 흑인 민권 운동 이야기

 

미국 노예해방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

세계 어느 곳에나 각 시대에 놓인 사회의 차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써온 사람들이 있다. 때문에 과거의 수많은 사회 운동은 누구 한 사람의 업적으로 대표성을 가지는 것이 아닌, 변화를 희망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동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프레더릭 더글러스 역시 미국 노예 해방을 위해 굳게 걸어 잠긴 문을 부수고 걸어 나간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가 걸어간 발자취를 통해 미국 노예제도 폐지의 흐름을 함께 살펴보자.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는 연설을 통해 노예 해방의 지평을 열어젖힌 미국 노예제 폐지 운동가이다. 연설가, 작가, 신문 편집인,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한 평생을 치열하게 노예제 폐지와 흑인의 권리를 위해 활동했다. 그는 1818년 미국 메릴랜드 주 해안가 주변의 대농장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당시 이름은 프레더릭 베일리(Frederick Bailey)이다.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1818-1895)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1818-1895)

당시 공업이 발달하여 노예제도가 없는 북부와는 달리 농업 문화 기반 사회인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노예로서 살아야 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농장의 소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일해야 했으며 뜻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주인이나 노예 감독관에게 매질을 당했다.

또한 노예들은 원칙적으로 글을 배울 수 없었다. 그 당시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노예에게 글을 읽도록 가르치는 백인들 역시 심하게 처벌을 받았다. 노예들은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교육의 통제는 곧 지배자의 권력이었다.

하지만 프레더릭은 볼티모어에서 만난 여자 주인 소피아에게 알파벳을 배울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소피아의 남편이 이를 강경하게 반대하게 되며 그의 글공부는 결국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더릭은 글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거리의 가난한 백인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 주며 그들을 통해 계속 글을 익혀 나갔고 손에 잡히는 책이나 신문은 눈에 보이는 족족 읽어나갔다.

183821살 무렵 프레더릭은 첫 번째 탈출의 실패 후 두 번째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그는 노예제도가 없는 뉴욕으로 가서 프레더릭 더글러스로 이름을 바꾼다. 그는 그곳에서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애나 머레이(Anna Murra)를 불러와 결혼한다. 프레더릭이 메릴랜드 주에서 노예 생활을 할 당시 만난 애나는 흑인 자유인으로 그녀는 프레더릭의 노예 탈출에 큰 역할을 한다. 애나와 함께 프레더릭은 자신을 쫒을지 모를 추격자들을 피해 뉴욕보다 조금 더 안전한 매사추세츠 주로 떠난다. 그 당시 흑인들의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시에서 그들은 백인들에 비해 빈약한 권리를 가진 노동자로 살아야 했는데 그와 애나 역시 고된 노동환경과 마주해야 했다.

1841년 프레더릭은 노예제도 폐지 모임에서 백인 노예 해방 운동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을 만난다. 윌리엄은 백인들 내에서 노예제도의 즉각적 폐지 운동을 벌인 언론인이었다. 그는 해방자”(The Liberator)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노예제도와 이를 존속시키는 정부에 강력한 반대를 펼치고 있었다. 또한 그는 1833년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노예제 폐지 협회(American Anti-Slavery Society)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협회는 1838년 미국 전역에 1300개가 넘는 지부와 약 25만 명의 회원이 생겨날 정도로 그 규모가 확장된다.

어느 날 프레더릭은 매사추세츠 노예제 폐지 회의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프레더릭의 연설에 감탄한 윌리엄은 그에게 자신의 협회에서 함께 활동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프레더릭은 윌리엄과 뜻을 모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노예제 폐지 연설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대중 앞에서 명확한 언어로 유창하게 연설하는 프레더릭을 보며 그가 노예였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만큼 그의 연설은 대중으로부터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뛰어난 설득력을 자랑했다. 프레더릭은 오랜 시간 동안 윌리엄과 우정을 쌓으며 미국 노예제 폐지 협회에서 정열적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프레더릭은 윌리엄과 운동 방향성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자신의 길을 걷게 된다. 둘이 결별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프레더릭은 남부의 노예제도가 연방정부(중앙정부)의 힘과 법의 손질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으로 폐지되길 원했다면, 윌리엄 개리슨은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헌법을 가진 나라 미국 그 자체를 비난하고 부정했다.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밑그림은 달랐으나 두 사람 모두 노예해방을 끊임없이 바라고 몸으로 실천했던 급진적 운동가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1845년 프레더릭은 자신이 살아온 노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 (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를 펴낸다. 그 당시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노예제도에 대한 철학보다는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연설해야 했다. 이런 제한적인 상황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있는 그릇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는 노예제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기록하기 위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된 프레더릭의 책은 노예였던 그의 자서전이자 노예제도로 고통 받는 수많은 흑인들의 삶을 대신 말해주는 문학적 증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그의 책은 대중에게 큰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내며 미국 북부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로 뻗어 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도망 노예 신세였던 그는 이러한 유명세로 인해 이전 주인이나 추격자들에게 언제든지 발각될 수 있었다. 결국 프레더릭은 자신을 향해 좁혀오는 위험을 피해 아일랜드로 떠나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그랬듯 아일랜드와 영국 전역을 돌며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연설 활동을 계속 해나간다. 그곳에서 프레더릭은 영국인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과 교류하게 되는데 그들은 프레더릭을 위해 모금활동을 벌여 돈을 마련한다. 이때 약 700파운드의 돈이 모이게 되고 프레더릭은 이 돈을 통해 노예 신분을 벗고 자유인이 된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847년 뉴욕에서 북극성”(North Star)이라는 노예제 반대 신문을 발행하며 노예 해방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간다.

프레더릭은 1848년 뉴욕 세니카폴스에서 열린 미국 최초 여성 권리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에 지지 의사를 밝힌 유일한 남성이 된다. 이 날은 이 집회를 주도한 여성운동가이자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엘리자베스 스탠턴 (Elizabeth Cady Stanton)이 여성의 독립선언문인 여성의 소신선언을 발표했던 날이다. 이 때 프레더릭은 연설을 통해 여성을 포함한 미국의 사회적 약자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당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불가능했고 이에 미국 각지에서 여성들이 투표권 행사 권리를 갖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프레더릭은 수전 앤서니(Susan B. Anthony)와 같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여권 운동에 관심을 갖고 함께 연대한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당시 미국은 북부의 주들과 남부의 주들이 서로의 이권 다툼과 노예제 찬성과 반대라는 의견 불일치로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마침 링컨의 당선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남부의 여러 주가 미국 연방에서 탈퇴한다. 이로서 미국은 남부 연합과 북부 연합이라는 두 개의 국가 단위로 분리된다. 결국 1861년 북부의 23개 주와 남부의 11개 주가 서로 총을 겨눈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시작된다. 그리고 전쟁 중이던 1863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이 이루어진다. 이어 북부 연합에 흑인들을 병사로 참여시키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면서 수많은 흑인들이 남부 연합과 맞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북부의 흑인 병력 투입은 남부 연합의 노예제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 프레더릭은 흑인들의 자원입대를 위해 활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4년 동안 지속된 치열했던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1865그 어떤 노예제나 강제 노역도 미합중국과 그 사법권에 속하는 영역 내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수정헌법 제13조가 미국 의회에 통과되면서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노예 제도가 사라진 후 남부의 흑인들은 자유인이라는 신분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또한 정치 영역에서도 그들의 입지는 매우 비좁았다. 그 당시 백인뿐만 아니라 유색인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황된 현실이었다. ‘인종, 피부색, 과거의 신분을 이유로 투표권이 거부당해서 안된다는 수정 헌법 제15조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이 투표권은 여러 이유로 교묘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투표를 하려면 글을 읽고 쓰는 시험인 문맹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는데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훨씬 어려운 시험지를 풀어야 했다. 또한 할아버지가 투표권이 있는 사람은 따로 투표 심사를 받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 덕분에 투표를 할 수 있는 대상은 이미 백인들로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따라서 이 당시 흑인들의 권리 향상을 위한 운동들이 남부 사회에서 일어나게 되고 프레더릭은 연설과 글을 통해 인종 차별의 현실을 고발하며 맞서 나간다. 그 후 프레더릭은 워싱턴 D.C.에서 연방 보안관을 시작하게 되며 외교관을 비롯한 여러 공직을 지낸 뒤 1895년 심장 마비로 눈을 감는다.

프레더릭은 살아 있는 동안 세 권의 자서전을 썼다. 21살 극적으로 탈출한 뒤 연설가로 활동하며 쓴 자서전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 (1845)>를 비롯하여 <나의 속박과 나의 자유(1855)>,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생애(1881)>가 있다.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흑인 역사의 달이 그의 생일 2월로 정해진 것은 아마도 역사에서 이루어진 노예제도의 불합리함을 돌아봄과 동시에 그에 순응하지 않았던 프레더릭과 같은 수많은 이들이 쌓아온 노력을 기억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처럼 미국 역사에는 억압받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길 포기하지 않았던 흑인들의 기나긴 투쟁의 역사가 함께 한다. 따라서 흑인 역사의 달에는 여러 교육기관에서 흑인 민권 운동에 관련된 연사를 초청하는 것은 미국의 자연스러운 문화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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